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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역사 2부 유럽으로 퍼진 커피향기 - 독일의 제왕 맥주 ⅰ

by 앤유 2021. 1. 19.

북부 독일에서 맥주가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로, 그 역사는 250년을 넘지 않는다. 더구나 맥주가 배타적으로 독점한 시기를 이야기하면 그 기간을 더 짧아진다. 트라키아인이나 스키타이인같은 바바리안들처럼 초기 튜튼족도 맥주를 마시기는 했으나 이들은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와인을 신격화 했던것처럼 맥주를 신격화하지는 않았으며 맥주를 삶의 중심에 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에 맥주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었다. 보리나 밀을 발아시킨것으로 만든 음료인 맥주는 타키투스가 편견없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매우 질나쁜 와인을 닮아 있었다. 로마의 역사학자였던 그는 비판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며 단지 튜튼족의 맥주음용에 대해 사견을 개진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튜튼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 요량으로 그들이 원 없이 마실만큼 충분한 맥주를 제공한다면 무력을 쓰는것보다 훨씬 쉽게 그들을 정복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튜튼족을 취하게 만들었던 맥주는 오늘날 우리가 맥주라고 알고있는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8세기 이전에는 독일에 맥주의 주성분인 홉이 자라지도 않았었으며 홉의 꽃이 맥주의 원료로 쓰이게 된것은 1070년에 이르러서였다. 초기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맥주보다는 벌꿀술이나 메테글린(꿀을 물에 타서 발효시킨 음료)을 더 많이 언급하고있다. 

 

 그러나 독일인들 사이에서 맥주음용은 점차로 줄어들게된다. 개척자들의 여정을 뒤따라 이들 역시 점차 로마문명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로마군대, 로마무역상, 로마 법관들이 사는곳에서 맥주는 인기가 없었다. 바쿠스는 기세좋게 스페인과 이른바 로마의 영토인 갈리아의 맥주 양조에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의 박물학자 폴리니우스에 따르면 당시 맥주는 '케레비시아'라고 불렸으며 이는 '케레스의 힘' 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쿠스는 케레스보다 강했고 와인은 맥주보다 강했다. 서부와 남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가 효과적으로 식민정책을 펴고있는 곳에서는 존 발리콘은 결코 최고의 지배자가 될수없었다. 

 

 특히 지중해연안으로 옮겨온 독일의 집단 이주민들은 맥주에 대한 와인의 우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중세를 통틀어 독일문명이 활기를 띠는 동안 맥주의 위상은 미미했다. 다뉴브의 호화로운 정원에서도 취리히의 음유시인들사이에서도 콩스탕스 호수에서도 네카어 강에서도 마인강에서도 그 시대에는 누구도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위대한 산업의 원동력이었던 '제왕 맥주'는 중세가 막을 내릴때까지도 북부에서 시작한 그 세력을 남부 독일까지 확산시키지는 못했다. 5세기동안 맥주가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것은 북해의 안개속에서 번성한 도시에서였다. 

 

 맥주는 함부르크의 부를 이룬 주요한 자원 가운데 하나였다. 한 세기전, 메카에서 전해진 커피가 오스만제국을 정복하는동안 맥주는 함부르크를 기점으로 네덜란드와 유틀란트반도, 스웨덴, 그리고 러시아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함부르크의 화물선들은 스카게라크와 카테가트 해협을 통과하여 사운드해협과 벨트 해협의 바닷길을 헤치며 맥주를 실어날랐다. 그들은 맥주와 함께 또 다른 일용품들을 잔뜩 싣고있었는데, 이것들 또한 맥주와 잘어울리는것들로 갈증을 배가시키는 소금에 절인 청어같은것이었다. 함부르크의 화물선이 도착하는 항구에서는 어김없이 흥청망청 맥주와 청어의 향연이 벌어졌다. 갈증난 목구멍은 함부르크의 맥주로만 해갈이 되었다. 조이데르 해와 프리지아제도 베르겐과 헬싱보리, 단치히와 리가, 쾨니히스베르크 등지는 맥주로 넘쳐났고 누런바다는 하얀 맥주거품에 휩싸였다. 화물선 뱃머리에는 한자동맹의 깃발이 나부꼈다. 

 

14세기 내내, 한자동맹에 속하는 항구중 하나인 로스토크에서 출발하는 상선의 화물이 주로 맥주였음을 증명하는 문서가 여럿있다. 목적지를 대개 브뤼헤였다. 그러나 사운드 해협을 지나는 중에 데인족의 습격을 받아 화물을 약탈당하는 사례가 빈발했고 빼앗긴 맥주상자들은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코펜하겐으로 옮겨졌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불멸의 시구에서도 데인족이 맥주를 얼마나 좋아했는가를 찾아볼수있다. 그들은 햄릿의 숙부 클로디우스왕의 정원에서 취하도록 마셨고 왕이 큰 술잔을 높이 쳐들때마다 대포가 불을 뿜었다. 

 

 이처럼 흥청망청 이리저리 술을 마셔대니,

외국의 증상과 비방을 듣게되지않나.

주정뱅이니 돼지같다느니 하는 욕을 듣게되는거지

그러니 우리가 애써 이룬 최고의 공적도

명예로운 알맹이는 다 없어지고 마는셈이지

 

 이런상황이니 만약 햄릿이 되살아나 조그만 나라 덴마크가 국민 1인당 11파운드 반을 소비하는 세계에서 가장 커피를 많이 수입하는 나라로 기록된 1932년 브라질 커피협회의 보고서를 본다면 놀라 까무라칠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북유럽에서는 취하도록 과하게 술을 마시는 풍조가 만연했다. 전투용 도끼와 검으로 무장한 비틀거리는 거인 맥주는 거침없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바이킹들은 항해중 빙하를 만나면 맥주를 마셔서 온기를 유지했다. 그들의 항해는 물뿐만 아니라 맥주로 흠씬 젖은 항해였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맥아로 주조된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의 턱수염은 맥주에 절었고 큰 술잔은 금세 맥주로 다시 채워졌으며 맥주통의 마개는 닫힐 새가 없었다.

 

 북서부 일대와 북동부 일대 전역이 거대한 맥주창고가 되었다. 당대 사람들의 눈과 혈관 그리고 감각은 맥주에 절어있었다. 맥주가 그들의 간장, 목소리, 심장을 틀어막고있었다. 그들은 맥주속에서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했다. 함부르크가 덴마크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소요된 예산의 상당부분을 맥주가 차지했다. 슈트랄준티에서 군대와 해상전투 병력에 보급한 식량의 2분의 2가 맥주에 할당되었고 뤼베크 해전에서는 소요된 1640마르크 중 1140마르크가 맥주에 쓰였다. 한자동맹의 회계기록에 보면 20명의 선원이 평균 57갤런의 맥주를 마신것으로 되어있고 1400년대의 또다른 기록을 보면 함부르크에서 1200명을 대상으로 직업조사를 한결과 460명이 주조업자였으며 100명이상이 맥주판매업으로 종사하고있었다. 말하자면 당시 직업인구의 45퍼센트가 맥주산업에 종사하고있었던 셈이다

 

맥주 제조업자들은 무역업자인 동시에 독과점 사업자들이었다. 하를렘의 주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북부 독일이 맥주 수입을 금지한 1400년까지 그들은 네덜란드와 프리슬란트의 맥주판매 촉진을 위해 할수있는 모든 조치를 했다. 이는 사실 그리 길지않은 기간이었다. 그즈음의 플랑드르인들은 직접 맥주를 주조하고있었다. 그 지역의 신화에서는 맥주의 본고장이 독일이 아니라 플랑드르라고까지 이야기된다. 이들이 말하는 맥주의 원조는 '갬브리누스'라는 이름으로 현대 맥주홀에서 나무로 된 신위로 쉽사리 만날수있다. 갬브리누스는 장프리무스 혹은 장 1세로 알려진 13세기 브라반트공국의 공작으로부터 연유되었다고 전해진다. 장은 실제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갬브리누스는 아마도 플랑드르 맥주 발명가가 아닌가 싶다. 어떤사람은 이 훌륭한 인물이 샤를마뉴 대제라고 하기도 한다. 수세기가 흐른후 와인을 마시는 나라 스페인의 필립왕이 저지대국가를 점령했을때 스페인의 포도주는 거리와 시장과 길드하우스에서 맥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