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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역사 2부 유럽으로 퍼진 커피향기 - 독일의 제왕 맥주 ⅱ

by 앤유 2021. 1. 20.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미가 북유럽 미술에서 묘사되기 시작했다. 즉 인간의 골격이 철저히 가려진채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딕 미술에서는 이런 형태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나움부르크, 밤베르크 내지는 마그데부르크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조였다. 뿐만 아니라 기사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무덤에 세워진 숱한 인물상들 가운데서도 그런 특징은 찾아볼수가 없아. 성당 건축이 한창이었던 시대에 조각가들은 모델이 되는 대상의 자연적인 부분을 취해 '눈에 보이는대로' 일반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곤 했다. 드물게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류가 아니었다. 따라서 무덤에 세워진 조상이 예외없이 당사자의 초상이라고 추론한다면, 당시 북유럽인들중에서 비만은 아주 드물었던 것 같다. 실제로 비만인 사람은 별난 캐릭터로 여겨져 스페인의 저 산초판자처럼 풍자만화의 대상이 되어싿. 즉, 비만은 중세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존 불같은 인물은 중세에는 상상조차 할수없는 캐릭터였다.

 그러다 인보눚의의 신기원이 열리면서 북서부와 북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인체의 묘사에서 갑작스럽고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영국, 네덜란드, 덴나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특히 저지대 독일에서 인간의 '살'을 표현하는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더구나 사회 지도층 - 왕족이나 예술가, 지식인, 장군, 성직자, 음악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 - 이 이런 움직임의 주체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전환인가! 세계가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인간이 대지위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로 비만이 건강, 힘, 천재성, 위엄의 동의어로 여겨졌던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400년부터 1700년까지는 비만에 대한 맹신이 북유럽 전체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에는 정말로 많은 명사들이 뚱뚱함을 과시했다. 구스타브 아돌푸스, 헨리8세,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마틴 루터, 프릭하이머, 요한 폰 슈타프피츠, 페터 피셔, 그리고 한스 작스, 헨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그 외에도 숱한 사람들이 비만의 대열에 들었다. 

 우리들에게 이 명사들은 과히 보기 안좋은 뚱보일지 모르나 그들 스스로 는 툭튀어나온 배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만약 보기에 좋지 않으니 살을 빼야한다고 하면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푸스 - 뤼첸에서 전사한 프로테스탄트의 영웅- 의 기념비적인 조각상을 작업하면서 그의 거대한 배를 상징적인 의미로 부풀리는 일 따위는 어떤 조각가라도 꿈도 꾸지 않을테지만 당시의 정서로는 이들이야말로 '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형'으로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윈 모습은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외젠 공작, 프리드리히 대왕등은 건강하지않을뿐 아니라 병적으로 무기력한 사람들로 피부되었다. 오늘날 야회복이나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을 만난다면 야위었다는 바로 그점때문에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보다 훨씬 더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그런사람들이.

 

 그러나 이러한 비만한 '괴상한 부대'가 득세했던 지역은 오로지 북유럽으로 국한되었다. 남유럽에서는 여전히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선호했다. 와인을 마시는 나라의 사람들인 스페인 사람들과 중부 및 남부 프랑스의 주민들, 이탈리아와 그리스인들, 헝가리와 다뉴브 일대의 와인 양조업자들은 인체에 대한 관심과 표현의 인플레이션에 전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을 하더라도 극히 미미했다. 이들에게는 이 인플레이션이 그저 맥주를 과도하게 들이킨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식단이 빚어낸 현상에 불과했다.

 와인이 창자와 조직 세포를 씻어내는 음료로서 - 아주 독한 와인을 제외하고 - 마술같은 힘으로 인간의 중앙신경체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반면 맥주는 단지 음식일 뿐이었다. 맥주에는 알코올과 물 이외에도 알부민, 덱스트린, 영양염분, 그리고 설탕이 함유되어 있기 대문이었다. 주조된 맥주 1리터에는 알부민 5그램과 탄수화물 50그램이 들어있는데, 이 영양소들이 거품이 이는 탄산과 함께 유동적이고 쉽게 결합될수 있는 형태로 인체의 조직에 스며듦으로서 맥주가 대중적인 음료가 되기 이전에는 결코 볼수없었던 인체의 형태를 만드는 근간이 되었다.

 

 맥주소비가 정점에 이르렀던 15~17세기에는 지금처럼 맥주를 대중식당이나 주점에서 마시지않고 집에서만 마셨다. 그런데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 즉 만드는곳에서 마신다는 점이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필요에 따라 맥주를 만들수있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모든 음료에 세금을 부과할수 있었으므로 맥주 주조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않았다. 이에 따라 맥주소비는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나 1661년 선제후인 얀 게오르크가 새로운 과세령을 발표한것으로 미루어 시골에서는 불법주조가 만연했음을 짐작할수있다. 이 칙령에 따르면 가정에서 주조한 맥주는 팔거나 여러사람에게 공급하는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금지령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맥주를 마실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식료품에 관련된 법을 살펴보면 일상샐활에서의 맥주의 중요성을 실감할수있다. 1719년 율리우스 베른하르트 폰 로어는 독일 가정의 샐필품 및 일용잡화와 관련된 법 조항의 요약문을 작성했는데, 맥주 주조와 관련된 20가지 항목을 기술하는 데만 1000페이지 이상을 할애하고있다. 이는 맥주가 독일인의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독일인의 성에도 맥주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15세기에는 비어메르,비어만, 비어슈발레, 비어할스, 비어프로인트 등 맥주를 뜻하는 비어가 붙은 성이 많이 생겨났고, 비어바겐, 비어트륌펠, 비어작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맥주를 특히 많이 마시는 사람을 지칭했다.

 

 시민들의 하루는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끝났다. 아침에는 목을 축이기위해 한잔, 점심에도 맥주수프를 먹었고, 저녁에는 맥주로 만든 에그노그가 반드시 곁들여졌다. 건포도 맥주나 설탕 맥주도 나왔고 맥주에 넣어 익힌 생선과 소시지도 애용되었다. 그야말로 맥주는 어디에나 빠질수없는 약방의 감초같은 식품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때나 사업상 얘기를 나눌때, 세례를 받을때, 장례식에 맥주가 빠질리가 없었다. 이렇게 맥주를 달고 살다보니 과도한 탄수화물로 인해 사람들이 뚱보로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호흡과정이 혈중 탄산을 제거하는데 주목적이 있다고 하면 탄산으로 우리몸의 조직을 끊임없이 과포화상태로 몰아가는것은 개인에게나 그가속한 공동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을 대담하고 생기있게 만드는 와인과 달리 맥주는 사람을 감상에 젖게하고 기분을 저조하게 하는것이.

 20세기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어난 매우 유효적절한 절주운동은 이 반도의 거주민들이 어떻게 호리호리한 몸매와 원기왕성함을 유지하는지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괴테는 독일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기를 바랐다. 맥주마니아들의 입장에서보면 적이라 할수있는 사람들중 괴테만한 통찰력을 가진이는 없었다. 바이마르 궁정에서 왕자들의 가정교사로 있던 크네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괴테는  "맥주가 신경을 무디게하고 혈관을 두텁게 만든다"고썼다. "만약 이런식으로 3세대동안만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댄다면 독일은 그야말로 재앙에 휩싸일걸세! 그폐혜는 우매하고 빈약한 문학으로 먼저 눈에 띌것이나, 우리 후손들에게 가면 그 놀랄만한 위협에 비명을 지르게 될거란 말일세!"

 이런상황에서 도대체 커피는 어떤방법으로 이 거인과 맞서 싸울수있었을까? 이 전쟁은 처음부터 너무 불공평했다. 맥주가 와인을 초토화 시키고있을 즈음 독일일부에서는 포도재배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맥주가 승리를 거두기 전 독일에는 포도재배 문화가 강하게 정착되어있었다. 중세내내 북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포도밭이 성공적으로 경작되고있었는데 지금 그것들이 사라진 이유를 이야기하라고하면 경솔한 이들은 기후 변화때문이라고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보다는 종교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독일인들이 경작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만들기도 까다로운 와인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주조가 간편한 맥주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