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세계무역의 주요 통로로서 많은 양의 커피가 제국의 남동쪽 관문을 통해 비엔나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일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파괴의 위기에서 황제의 수도를 구한 연합군 분견대 병사들은 귀향하면서 커피를 가져가지 않았다. 만약 커피가 당시 드레스덴에 도입되었다면 그곳의 역사가 하셰가 그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계는 비엔나를 침공했던 투르크군이 패한 3일후 1683년 9월 16일에 때마침 추수감사절 축제가 드레스덴에서 열린것을 기록했다. 그해 10월 1일에 드레스덴의 병기창 뒤편에서 전리품 전시행사가 열렸다. "리본으로 묶어놓은 다채로운 색깔의 면으로 된 투르크 막사 5채가 매우 고가의 품목으로 선을 보였고 6자루의 무거운 총도 있었다. 코끼리도 있었지만 찬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곧 죽었다. 전리품중 가장 많은 동물인 낙타도 날씨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다. 숱한 진귀한 필사본 외에도 코란의 고대 필본이 있었는데 아랍의 성서답게 실크로된종이위에 새겨져 광택이 났다." 커피가 있었더라면 하셰가 그 사실을 언급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으로 보아 귀향하는 작센의 병사들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수있다.
콜쉬츠키의 커피하우스 개점이 독일의 커피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까지는 말할수없지만 적어도 비엔나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에 대한 소문은 다뉴브 일대에 자자했었고 이것이 독일에 중요한 영향을 준것은 사실이다. 물론 비엔나 사람들조차도 새로운 음료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남부 독일의 대다수 주들이 이문제를 거론하는데 게을렀던 것은 전혀 놀랄일이 아니다.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 음용법에 대한 이야기가 다뉴브 전체로 퍼져나간것은 3년이 지난 후인 1686년 이었고 그해에 라티스본에 첫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먼길을 훌쩍 뛰어넘어 북쪽의 뉘른베르크에도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커피의 보급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커피가 또다시 진전상황을 보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용품이 대개 그렇듯이 커피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아래 놓여있다. 그럼 그 시대에 커피의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졌던 것인가? 처음 비엔나 사람들이 보유했던 커피는 전리품이었고 오래지않아 누군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를 통해 신선한 커피를 들여와야했다. 비엔나 전투 이후에도 투르크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지만(황제의 군대가 발칸반도를 침공하여, 술탕의 군대와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와는 상관없이 육로로 들여오는 근동의 상품은 운송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그 이유만으로도 독일인들이 소비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나마 북부독일과 중부 독일로의 상품유입은 베니스를 통한 해상운송만이 가능했다. 투르크의 입장에서 볼때 베니스는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도시였다. 투르크가 남동부 유럽의 영토를 점령해 들어갈때부터 곳곳에서 에게해 연안과 그리스 해안을 따라 무역을 해온 베니스인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상거래는 베니스에서는 삶과 같은것이었다. 이도시에는 곡물이 자라거나 가축을 방목할만한 땅이 없었다. 베니스 공화국의 시민들은 석호와 운하사이에 있는 좁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았고 그렇지 않을때는 바다에서 대개의 시간을 보내는 선상생활을 했다. 어쨌든 베니스와 투릌트 사이의 전쟁이 수백년 동안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쌍방관 무역이 완전히 중단된적은 한번도 없었다. 동유럽과 서유럽 즉 베니스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육로가 전쟁이나 긴박한 전운 때문에 폐쇄되었을때도 아드라아 해와 모레아 소아시아, 이집트 사이의 상거래는 지속되었다. 이는 종교적 정치적 반목과 대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상교역이 초승달과 십자가 모두에게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투르크와 가장 격렬한 해상전쟁을 벌인것은 베니스였다. 그러면서도 양국은 전쟁 직전까지 한쪽이 다른쪽에게 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목재를 공합하는 묘한 관계를 갖고있었다. 베니스인들은 아레스와 헤르메스의 기질이 적당히 섞여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나라의 외교관들이 유연한 자세를 견지한것은 전사와 상인을 모두 포용하는 정책의 소산이었다. 그리하여 베니스는 계속해서 남동쪽으로부터 이윤을 낼수있었다. 그러나 베이스인들은 항해를 업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육로를 통해 북방 또는 서방으로 교역을 확대해 나갈 생각은 거의 아니 전혀 하지 않아싿. 이 도시공화국에서는 함대가 나침반에 의지해 항해를 하는것은 매일 아침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익숙한 반면 산을 넘는것은 기피되었다.
소아시아인들에게 알프스는 지리적으로뿐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장벽으로 작용하여 이들은 등반에 관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우에른을 넘어 필라흐 클라겐푸르트까지 또 잘츠부르크와 바바리아를 사앧로 교역하기가 훨씬 쉬웠을것이다. 대신 이들은 알프스를 통하지 않고 독일과 육로교역을 했는데 이는 모든면에서 훨씬 덜 상업적이었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사람들처럼 그들은 뱃사람이었다. 배로 우회를 하면했지 알프스를 넘어서 상품을 나른다는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점점 더 대담해져서 플랑드르까지 상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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