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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역사 1부 이슬람의 와인 - 콜쉬츠키의 수훈 ⅰ

by 앤유 2021. 1. 18.

 오스만제국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이스탄불의 옛 명칭인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를 정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했다. 이 도시를 중앙에 두고 하늘과 동 서 남 북의 방향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1460년 경에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정복되었고 2년후에는 왈라키아가 1517년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헤자즈, 그리고 이집트가 정복되었다. 또 2년후에는 알제리가 또 35년의 세월이 지나서 트리폴리와 튀니스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 즈음에 크림, 몰도바, 트란실바니아, 그리고 헝가리가 연맹을 맺거나 속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슬람은 서방 칼리프 세력권의 본령이었던 스페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서방 유럽에 그 어느때보다 큰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동쪽으로는 타타르족이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을 무렵, 승승장구를 거두던 이슬람의 행운에도 종말이 찾아왔다. 그들의 행진은 1683년 비엔나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발목이 잡혔고 1686년에는 부다를 다시 빼앗겼다. 그 이후부터 이슬람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쇠퇴는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비엔나에서의 패배로 인해 수세기동안 정복국가로 군림해왔던 오스만제국의 운명은 극적인 전환을 맞았는데 희한하게도 이는 커피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다. 투르크의 흥망성쇠는 커피의 역사와 뗄수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는 투르크가 비엔나를 공격할 것을 예견하고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던 사절로부터 계속 정보를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투르크의 술탄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야망가인 투르크의 대신 카라 무스타파는 술탄의 궁정에서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이를 공고히 할 요량으로 전쟁을 일으키려했다.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

 

 레오폴트 1세는 린츠로 도망가서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와 세습귀족들 폴란드 왕과 논의하여 투르크에 대항할 군사력을 결집시켰다. 비엔나는 곧 카라 무스타파휘하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투르크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무기고 근처까지 화염에 휩싸였다. 도시는 곧 무너질것만 같았다. 비엔나시장 리벤베르크와 시민군의 우두머리 스타헴베르크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시민들이 공황상태로 빠지는것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참호와 광산으로 계속해서 포탄이 날아들었다. 우물앞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러나 달이 바뀔때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초승달처럼 투르크의 포위공격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이어졌다.

 

 7월이 그럭저럭 지나고 8월이 되자 이질이 창궐하여 모든 병원은 환자들로 터질듯 붐볐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항전을 계속할수있는 기적의 손길은 없었다.

 비엔나만 함락시키면 다뉴브에서 린츠로 가는 길이 투르크에게 활짝 열리게 될터였다. 그렇게되면 파사우와 라티스본이 함락되고 바바리아와 스와비아도 정복될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투르크는 콩스탕스호수위로 우뚝 솟았을 것이다. 또한 유럽은 지금과는 다른 역사를 밟게 되었을 것이다 비엔나를 지키고자 한 이들의 항전은 어떤의미로는 프랑스 땅을 지킴으로써 사라센으로부터 전 서방세계를 구한 카를 마르텔의 전투에 이은 제 2의 투르-푸아티에 전투였다. 

 

 궁지에 몰린 비엔나 시민들에게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용기를 준 사람은 폴란드인 게오르크 콜쉬츠키였다. 갈리치아의 삼보르 태생으로 오랫동안 투르크의 통역사로 활동하면서 투르크인들과 섞여설았던 그에게, 지원군의 대장 로렌 공작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투르크의 봉쇄선을 뚫어야했다.

 

 그는 시종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투르크복장으로 위장하고 1683년 8월 13일 비엔나를 빠져나가 투르크군의 막사 사이로 길을 재촉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콜쉬츠키는 투르크어로 즐겁게 노래까지 불렀다. 우연처럼 두남자는 투르크 군사령관의 텐트앞에 멈춰섰다. 신앙심이 깊고 자비로운 투르크사령관은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지는 뼛속까지 흠뻑 젖은 이 두 남자를 측은히 여겨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잘 익은 포도로 허기를 채우고자 포도밭이 있는 서쪽으로 가기위해 진지를 떠난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령관은 포도가 금지된 과일임을 주지시키고 포도재배자들 - 또한 질투심에 가득한 크리스찬들 - 이 고립된 무슬림을 꺾으려 한다는것에 대해서 말하며 조심하라고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어 커다란 그릇에 커피를 따라주면서 그것이 기독교도들이 마시는 와인보다 훨씬 알라를 기쁘게 하는 음료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막사의 서쪽으로 갈수있게 해주었다.

 

 이리하여 이 두사람은 포도밭을 지나 아무런 방해없이 나아갈수있었다. 칼렌베르크, 클로스테르노이부르크를 지나 칼렌베르게르도르프까지 갔을때 그들은 강 가운데 떠있는 나무로 뒤덮인 섬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얼핏 봐서는 그들이 투르크인인지 기독교인인지 구분할수가 없었다. 멀리서 주의깊게 살펴보니 여성들은 베일을 쓰지않았고 강물에 몸을 씻고있었으므로 두사람은 그들이 틀림없이 기독교인들이라고 판단하여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그러나 두사람을 투르크인으로 오인한 기독교들은 화승총을 쏘아댔다. 총알은 미하일로비치의 긴 투르크식 옷소매를 뚫고 지나갔다.

 

 콜쉬츠키는 자신이 기독교도이고 비엔나에서 온 특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보트를 보내 그를 독일측 막사로 데려갔다. 8월 15일 아침 그디어 그는 비엔나의 서한을 로렌 공작에게 전달했다. 공작의 답신을 품에 넣고 구두응답을 마음에 새긴후 콜쉬츠키는 미하일로비키와 한번 더 폭우를 헤치며 되돌아가는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누스도르프를 경유해 가기로했다. 누스도르프는 둘이 함께 가다가는 발각되기 십상인 지역이었다. 둘은 각자 다른길을 택해 가기로하고 형제애가 충만한 포옹을 나누며 서로에게 신의 가호를 빌어준뒤 헤어졌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낌 미하일로비치는 이내 콜쉬츠키에게 돌아왔다. 두사람은 지친 몸으로 동트는 새벽을 가르며 걷고 또 걸었다. 다 타버려 재만남은 도시 로사우를 거쳐 알세르바키스트라세에 이르자 5명의 투르크인이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의심하며 두사람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두 첩나는 쓰레기더미속으로 피했다가 지하 저장창고의 뚜껑을 발견하고는 가파른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 숨었다. 그들은 너무 지친 나머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한 투르크인이 저장창고로 들어왔다가 두사람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여 달아났다. 문제의 투르크인이 병사들을 데리고 올까 두려워 두사람은 그 창고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해야했다. 이번에는 마법의 음료로 활기를 되찾아줄 너그러운 사령관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행운은 두번 찾아오지 않았다. 허기외 피곤으로 반쯤 죽은 목숨이 된 그들은 밤이 깊어서야 비엔나의 쇼텐토르에 도착했다.

 

 콜쉬츠키의 대담한 여정과 행운어린 귀환은 포위된 비엔나 시민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시민들은 투르크 군대 저너머에 엄청난 기독교도 구원군이 서쪽에 집결해있다는 것을 알자 자유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방어군 사령관인 스타헴베르크는 로렌공작에게 콜쉬츠키가 무사히 귀환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성 슈테판 성당의 탑에서 세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콜쉬츠키와 미하일로비치는 2천 굴덴의 포상금을 받았다. 그 외에도 콜쉬츠키는 도시에서의 자유 레오폴트의 하이드가세 8번지에 마련된 거주지 그가 원하는 어떤 직업이든 가질수있는 특권을 제공받았다.

 

 콜쉬츠키가 대답하게 투르크 진영을 뚫고 지나온 일이 있은지 한달 정도 지난 9월중순 독일과 폴란드 연합은 마침내 비엔나를 구하기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9월 12일 길고 지겨운 기다림 끝에 비엔나 시민들은 콜렌베르그 정상에 폴란드군과 창과 깃발이 나부끼는것을 보게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기독교군 지휘관들은 적의 막강한 군대를 정면에서 볼수있었다.

 

 폴란드에 봉사하고있던 프랑스인 뒤퐁의 글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있다. "산등성이에 도착했을 때 놀랄만한 광경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레오폴트스타트 섬을 포함해서 평원 전체가 적들로 가득차 있었다. 투르크군이 쏘아대는 포소리는 마을의 성벽에 번진 불길로 화답했다. 화염과 연기가 도시를 뒤덮어 겨우 탑 꼭대기만 눈에 들어왔다. 투르크군의 병력은 20만에 달했으며 그들의 막사가 다뉴브에서부터 언덕까지 끝없이 뻗어있었다. 왼편으로 더 떨어진 곳에는 투르크의 후방 너머 타타르족 기병대가 숲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무질서하게 무리를 지어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자못 활발했고 당장이라도 기독교군으 향해 진격할듯 했다."

 

 그날은 라마단의 25일째 되는 날이었다. 해방군은 천천히 창병과 기마병을 향해 진군해갔다. 양 진영은 지버링과 푀츠라인스도르프에서 그리고 도른바흐와 다뉴브 사이의 긴 반원 지대에서 대치했다. 적진이 얼마나 가까웠던지 때때로 기독교 군대의 포탄이 포도밭에 배치된 적군과 고작 40보의 거리에서 발사되기도 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밸커런이 언급하듯이 "완전무장한 병사들과 칼과 단검으로 무장한 병사들, 화승총과 피스톨로 무장한 병사들간에 크고 작은 접전이 자주일어났다." 

 문제는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포도밭으로 숨어들면 투구만 보여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된다는 것이다. 폴란드의 왕 얀 소비에스키는 자국 보병들에게 밀짚으로 엮은 앞치마를 두르게하여 투르크군과 구별되도록 함으로써 적어도 기독교군 병사끼리는 서로를 해치는 일을 막을수있었다.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고 격렬한 백병전의 와중에 갑자기 투르크 진영의 중간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붉은 막사위로 메카에서 가져온 예언자의 초록색 깃발이 펄럭였다. 이는 '승리 아니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대개 이런 경우에는 죽음을 뜻했다. 그러나 투르크 용맹에도 불구하고 바덴과 프랑크 그리고 여타지역에 집결한 기독교 병사들은 이미 투르크의 진영을 유린하고있었고 메르시 백작의 기병과 보병들은 비엔나의 성벽에 접근해있었다. 그들은 스타헴베르크에게 바야흐로 반격할때가 무르익었노라고 소리쳤다. 한데 놀랍게도 성벽 가까이 있는 적의 참호에는 투르크 군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로렌공장이 군대를 웨링 근처까지 진격시켰을때쯤 이미 포위군중의 상당수가 동쪽으로 달아나버렸던것이었다. 

 

 

 투르크군의 패주가 그처럼 용맹스런 항전이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소비에스키는 이는 필시 계략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공격당할것을 염려하여 병사중 누구도 대열을 이탈하거나 약탈을 행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내려 군의 기강을 엄중히 단속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더이상 투르크의 공격은 없었다. 

 

 카라 무스타파의 막사에서는 수많은 전리품이 발견되었다. 소비에스키가 왕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투르크 총사령관은 얼마나 급했던지 타고있던 말 한마리와 입고있던 옷한벌만 가지고 달아났다오. 막사의 면적이 바르샤바와 렘베르크를 합한것만큼이나 컸다면 상상이 되겠소?" 이 전투에서 25000채의 장막이 훼손되지 않은채로 고스란히 포획됐고 소와 낙타와 노새 20만마리 양 10만마리 그리고 15만 포대에 달하는 곡식들이 쏟아졌다. 포위된 도시의 배고픔은 이로써 끝났다. 줄줄이 뛰쳐나온 시민들은 꿀과 곡식과 물이 산더미처럼 쌓인것을 보고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의 기쁨을 나누었다. 공성기간의 마지막 며칠동안 급등했던 식료품 가격은 썰물 빠져나가듯 다시 곤두박질쳐 이제는 쇠고기 1파운드를 6펜스에 살수있게 되었다. 

 

 전리품 중에는 기독교도들에게 아주 생소한 것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등 필요치않은 생소한것들을 가지고 하릴없이 장난치거나 심지어 없애버리기도했는데 예컨대 앵무새라든지 다마스커스 군사령관의 막사에서 은으로 된 쇠사슬에 묶인채 발견된 잘 길들여진 원숭이 같은 것들이었다. 그날밤 레오폴트스타트의 민간인들과 바바리아의 기마보병들은 사료처럼 보이는 검은 빛깔의 잘 말린 알갱이 500포대를 찾아냈다. 냄새는 그럴싸했지만 그 많은 포대에 담긴 검은 물질은 그들중 누구도 본일이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아마도 콩이거나 곡물일 것이었다. 때마침 바바리아의 기마대 중령한사람이 문제의 알갱이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다고 말했다. 다름아닌 낙타의 사료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전리품 가운데에는 낙타도 엄청나게 많았다. 긴 목에 두개의 혹이 있는 이 동물은 기독교도들에게는 타고다닐 일이 전혀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군인들은 검은 알갱이들을 다뉴브강에 모두 쏟아버리려고했다.

 

 그러나 레오폴트스타트 주민들이 이를 제지했다. 바바리아인들이 이포대들을 발견한 곳이 자기네 땅이었기 떄문이다. 그렇게 한참 옥신각신하던중에 기마 보병대원 한 사람이 포대하나에 불을 질러버렸고 내용물이 타들어가기 시작하자 향기로운 냄새가 뿜어져나왔다. 바로 그때 새롭게 비엔나의 시민이 된 콜쉬츠키가 하인에게 횃불을 들려 앞세우고 나타났다. 이제 그는 투르크의상을 입고있지 않았고 약속된대로 레오폴트스타트 마련해준 주거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특별한 직업을 갖고있지는 않았다. 

 

 콜쉬츠키의 후각은 불붙은 자루에서 새어나오는 향기를 들이마시자 흥분되었다. "오 이런" 그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여러분이 태우고있는것은 커피라는 물질이오! 커피가 뭔지 모른다면 내게 주시오 내가 요긴하게 쓸곳을 찾아낼수 있을것 같소."

 그 누구도 포위당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그토록 훌륭한 봉사를 한 건장한 이 폴란드인의 요구를 거부할수 없었고 결국 이 '쓸데없는 사료'는 그의 손에 넘겨졌다. 

 

 그 뒤 며칠동안 콜쉬츠키는 비엔나의 평의회 의원들 몇몇과 개인적인 면담을 했고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찾아냈다. 물론 콜쉬츠키가 그 당시 커피에 대해 듣고 마신 중부 유럽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다. 훨씬 이전에도 동부를 여행했던 기독교도 여행가들은 커피에 대한 소식을 전해왔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 희한하게도 많은 여행가들이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간과해버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안토니어 메나비노는 1548년 투르크인들이 마시는 음료의 목록에서 커피를 제외시켰고 10년후 페에르 벨론 역시 아라비아의 주요 관목을 기록할때에 커피나무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아프리카 식물로 여긴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