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여행서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저명한 의사였던 레온하트 로볼프가 쓴 책으로 여기에는 커피가 스와비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그가 1582년에 발간한 [모르겐란더의 쌀]이라는 책은 콜쉬츠키가 비엔나에다 첫 커피하우스를 연 때로부터 1세기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볼프는 1573년에서 1578년까지 근동에 살면서 멀리 페르시아까지 여행을 했다. 여행중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그는 이 음료가 수백년동안 음용되어왔다는 말을 들ㅇ었따. "사람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마시는 음료가 있었다. 그들이 '카우베'라고 부르는 이 음료는 잉크처럼 검고 위장장애의 치료에 효력이 있다. 아침 일찍 공공장소에서 도자기잔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다. 한번에 많이 마시지는 않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회합을 하기전에 잠깐 왔다갔다하면서 홀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음료는 부누라는 열매에 끓인물을 부어서 만드는데 부누의 크기와 색깔은 월계수 열매와 비슷하고 낟알은 두장의 얇은 열매판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카우베는 그들사이에 워낙 일반화된 은료여서 시장에는 부누 열매를 파는 상인이 부지기수였으며 음료를 만들어 파는 집도 많았다."
이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로볼프가 아라비아 이름외에도 열매의 에티오피아 이름 부누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붕크와 같은 말이다. 1717년에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인 휘브너의 백과사전에는 독일어 보네가 붕크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보네와 영어의 빈은 모두 옛 튜튼족의 고어인 바우나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커피에 대해 기술한 유럽사람은 프라스퍼 알바누스라는 사람으로 파도바의 식물학 교수였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가 그러했듯, 1592년 당대의 이집트는 마술의 본고장이라 할수있었고, 알바누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식물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이 학자가 쓴 글은 다음과 같았다. "투르크의 유원지에서 절친한 친구인 할리 베이와 나는 평범한 생김새의 열매를 맺는 훌륭한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본 혹은 반 이라고 불렸다. 아랍인들과 이집트인들은 이 열매로 검은 음료를 만들어 우리가 와인을 마시듯이 일상적으로 마시며 마을의 선술집 같은곳에서 팔기도 한다. 그들은 그것을 '카오바'라고 부른다. 반 나무의 열매는 아라비아 펠릭스에서 수입해들여온다. 전에 나는 이 나무를 본적이 있는데 잎이 유난히 두껍고 윤이 났으며 사시사철 푸르렀다."
식물학자로서의 소견에 이어지는 글은 의사로서의 소견이다. "투르크인들은 이 열매를 달인 즙으로 위통을 완화시키고 변비 치료에도 사용한다. 그들은 이 즙이 간장의 울혈이나 비장의 통증에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누구도 카오바가 자궁의 염증을 치료하는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집트 여성들은 생리기간중 특히 생리불순이 있을때 이 즙을 아주 뜨겁게 해서 조금씩 많은 양을 마셔서 통증을 다스린다. 치료의 용도로 쓰는일은 오랫동안 검증을 거쳐온것으로서 결론은 카오바가 신체를 정화한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자인 벨루스는 1596년에 커피콩을 유럽에 보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보낸 커피콩의 수령인은 클루시우스라는 의사 겸 식물학자였는데 벨루스는 그에게 커피콩을 불에 볶은다음 나우로된 분쇄기에서 으깨어 사용하는 법을 함께 전해주었다. 클루시우스는 비엔나의 임페리얼 가든에서 여러해동안 책임자로 일한후 네덜란드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이국적인 책을과 희귀한 역사라는 책을 저술하여 커피를 다루었다.
한편 인본주의자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1614년에 동방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서한집 투르크, 페르시아, 인도 여행중에 쓴 54통의 편지에서 커피를 언급하고있는데 약간 귀가 어두워서 카와를 잘못듣고 항상 카네라고 발음했다. 1615년 2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쓴글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투르크인들은 검은 음료를 즐겨마신다. 이 음료는 더운 여름동안에는 원기를 회복시켜주고 몸을 식혀주며 겨울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그러나 음료를 만드는 방법은 계절과는 무관해보였다. 음료를 마실때는 아주 뜨겁게 해서 한모금씩 홀짝거리며 천천히 마시는데 식사시간에는 식욕을 억제시킨다는 이유로 마시지않고 주로 식사후에 마시는 기호식품으로 애용된다. 이 음료는 사교나 대화를 촉진시켜 이것 없이는 친구들의 모임도 썰렁해진다. 그들은 이를 카네라고 부르는데 메카 인근의 아라비아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나는 열매이다. 투르크인들의 말을 빌리면 카네는 위장과 소화에 도움이 되고 산통과 비염을 완화시킨다. 또 저녁식사후에 마시면 졸음을 방지할수있어서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싶어하는 학생들이 좋아한다." 델라 발레는 12년후에 동양의 진귀한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는데, 커피콩을 소개하여 로마인들을 놀라게했다고 전해진다.
토머스 허버트 경은 영국 명문가의 자손으로 1626년 스무살 되던 해에 샤에게 사절로 가는 돗모어 코튼경을 수행하여 페르시아를 방문했다. 그도 역시 커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페르시아인들이 애호해 마지않는 '코호'또는 '코파'라는 음료가 있는데 투르크인들은 이를 '카페'라고 부른다. 어찌나 색이 검고 맛이 쓴지 언뜻보면 아케론을 떠온것이 아닌가 할정도다. 코호는 월계수의 열매를 닮은 둥근 알갱이로 만든다. 뜨겁게 해서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우울증을 몰아내고 눈물을 마르게 하고 화를 누그러뜨리고 기분을 좋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인들이 투르크인들만큼 커피를 대단히 떠받들지 않는것은 전통적으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호메트의 쇠퇴해진 에너지를 북돋기위해 이땅에 커피를 전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마호메트는 스스로 천명하기를 자신이 이 마술음료를 들이켰을때 40명의 사내를 말에서 떨어뜨리고 40명의 여자를 가질수있을만큼 강한 힘을 느꼈다고 했다."
아마도 지금껏 소개한 자료가 서방세계에서 기술한 글 중에서 커피를 칭송한 것이라 할수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부정확성이다. 토머스 허버트경 -그나마 그는 책임을 마호메트에게 떠넘겼다. - 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커피를 최음제로 묘사한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많은 이들이 커피의 효용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곤 했다.
이제 콜쉬츠키의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정오에 성 슈테판 성당의 탑 그림자가 내리는 돔가세에서 비엔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있는 교양인들 사이에서는 이내 커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다. 아무리 앞서가는 예술가나 의사, 성직자들 또는 상인들이라도 '투르크의 찌꺼기'에 대한 첫인상이 너무 나빠서 시음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와인 애호가였다. 그러나 전쟁은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부터 비엔나의 서부 외곽에서 번성했던 사랑스러운 녹색과 금색의 포도밭을 회복이 불가능할정도로 파괴시켜버렸다. 투르크군은 관목숲과함께 이곳에도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포도의 강한 줄기는 울타리를 만들기위해 꺾였고 수천마리의 낙타 당나귀 황소가 배출한 독한 소변은 토양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만큼 황폐화시켰다. 그 후 여러해동안 비엔나 사람들은 와인을 생산할수 없었으며 비싼값을 치르고 필요한 만큼 수입해야만 했다. 이렇듯 바쿠스의 관습에 따르는 즐거움을 빼앗겼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검은 아폴로의 음료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콜쉬츠키가 투르크의 막사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했던 커피콩포대는 양이 너무 많은게 단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커피더미에 깔려서 죽고싶은게 아니라면 상당량을 태워서 없애거나 어떻게든 커피를 팔아야만 했다. 그것도 '질 그리고 아주 훌륭하게' 팔아야한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손님들이 투르크식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좋아할만한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를 만들면돼"
그는 여과법을 이용해서 비엔나 시민들의 목에 들러붙는 커피찌꺼기를 걸러냈다. 한데 이렇게 하여 얻어진 맑은 음료는 커피맛은 침전물에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있었던 투르크인과 세르비아인은 물론 발칸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콜쉬츠키는 개의치않았다. 그는 깨끗하게 걸러진 커피에 대단히 만족했다. 그는 여기에다 잘 숙성된 꿀을 듬뿍넣고 우유를 가미하여 검은색을 희석하고 맛을 부드럽게 했다.
쉬오뎃 수도원으 이맘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여겼을것이다. "마호메트에게 내려진 선물을 멋모르고 약탈해간 '자우어와 개'에게 그걸 잘못 하용하는 일 외에 무엇을 더 기대할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또한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커피를 달게 만들고 우유를 타서 희석시키는일이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걸 누구나 알고있다."고
그러나 콜쉬츠키에게는 문제될것이 없었다. 그는 서방인의 기호에 맞는 맛을 찾아냈고 그로부터 전 유럽인들이 즐겨마시는 음료가 탄생한것이다. 그렇게되자 새 커피하우스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게다가 손님을 끄는 두가지 새로운 방법이 더 동원되었다. 이웃의 제빵사인 페터 벤들러와 계약을 맺어 가벼운 초승달 형태의 롤빵을 커피에 곁들여낸 것이었다. 비엔나 시민들은 매일같이 이 초승달 모양의 빵 크루아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바로 얼마전 폭풍처럼 비엔나를 쓸어버릴뻔했던 초승달 추종자들이 최근 크게 패하여 물러간것을 자연스럽게 회상했다. 또다른 특허품은 시럽을 채운 동그런 도넛 크라픈으로 세실리아 혹은 베로니카 크라프라고 불리는 빵 굽는 여인이 만든것이었다.
이리하여 커피와 우유, 크루아상과 도넛은 비엔나 커피하우스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의 초석이 되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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