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독일에서 포도재배 권역은 남쪽과 서쪽으로 후퇴하여 라인과 마인 주 다뉴브 계곡으로 옮겨졌다. 그 외 다른지역에서는 제왕 맥주의 승리였다. 이런 현상은 특히 갬브리누스가 윈헨 고원지대를 장악한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는데 브런즈윅에서 유입된 맥주 주조의 대가들이 한몫 거들었다. 이런 상황에 비엔나, 라티스본 등지에서 조그만 세력권을 이루고있던 커피가 맥주의 나라에 입성할수 있을거라는 기대는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누구도 비 독일적인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음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았던가?
오를레앙의 필리프 공작의 부인 리젤로테는 독일 팔츠지방 출신으로 공작부인이라는 신분때문에 파리에서 생활했는데, 이와같은 추세의 상징적인 본보기이다. 그녀가 쓴 편지를 보면 커피에 대한 완강한 거부감을 읽을수있다. 1712년의 크리스마스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커피나 차, 초콜릿따위를 참아낼수가 없을뿐더러 왜 많은 사람들이 그런걸 먹는지 이해할수도 없습니다. 나한테는 맥주수프가 제일이에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지요. 이곳에 맥주수프가 없는건 프랑스 맥주가 나빠서일거예요." 그녀는 1714년 10월22일자 편지에서도 "이 곳 사람들이 커피나 차, 초콜릿을 좋아하는것을 보면 놀라게됩니다. 내 사고방식으로는, 왕이라면 모름지기 소금에 절인 양배추와 훈제소시지로 식사해야한다고 보는데 말예요. 나는 파리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않는 온갖 진미보다도 베이컨이 든 양배추 수프가 훨씬 좋답니다." 라고했으며 1716년 2월 26일자에는 "나는 아침을 거의 먹지않으며, 간혹 아침식사를 한다고해도 메뉴는 늘 버터바른 롤빵이에요. 나는 다른나라의 음식은 뭐든 싫어요. 커피나 차, 초콜릿같은것도 질색이어서 전혀 입에 대지 않지요. 나는 식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독일식을 고수하고 내 선조가 먹고마시던것들만 먹을 생각이에요"라고 썼다.
이러한 습성에 대한 국가적 보수주의는 분명 치기어린 면이 있다. 어쨌든 커피는 중부 유럽에서 서부 유럽보다 더 느린속도로 퍼져나갔고 고지대 독일지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반화된 이후에도 8년이나 지나도록 커피가 대중적인 음료가 되지못했으며 그 결과 중부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곳보다 더 오래도록 알코올음료의 치세가 계속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근대의 태동기에 독일인들은 너나 할것없이 모두가 주당이었고 34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계급을 막론하고 지나친 음주가 몸에 베게 되었다. 브랜디와 맥주는 와인처럼 비싸지 않았으므로 그 심란했던 수세기 동안에 독일 사람들이 슬픔을 삭일수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폭음하는 풍토가 생겼을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시기 영국사람들은 똑같은 헤비 드링커였지만 주독을 해소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인 반면 독일인들은 안티 바쿠스적인 음료에 대해 아는바도 전혀없었으며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이시기에 알코올은 독일사람들에게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즈음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갈증을 증폭시켜 맥주에 더욱 탐닉하려는 애주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자, 군주, 공예가, 지식인, 농부, 군인을 막론하고 맥주를 즐겼고, 귀족들은 더 심하게 마셔댔다. 이러한 범국가적인 음주의 결과는 30년전쟁이 가져온 폐해보다 더 컷다.
물론 일부 성주들은 반기독교적이고 야만적인 음주를 금지하기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않았다. 급기야 작센의 선제후는 식당에다 술을 퍼마시는 돼지와 개들의 그림을 걸어두기까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궁정의 행태역시 포도재배가 여전히 유행하고있었던 일부 지역에서만 좀 나은 양상을 보였다. 일부 지역이란 이탈리아의 국경지역과 티롤, 스티리아 등이었다. 물론 브루고뉴와 스페인식 예절이 널리 퍼져있던 비엔나의 카이저호프에서는 돼지같이 과음을 하는것은 전연 불가능했다. 적어도 이론상으론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모두 알다시피 예외없는 이론이란 없는법이니까!
맥주의 절제 움직임중 두드러지는 사례로는 예수회 사제이자 유명한 설교자인 야콥 발데가 처음으로 마른사람들의 모임인 '콩그레가티오 마실렌토룸'을 창립한 일을 들수있다. 그만큼 1638년 당시에는 독일의 부유층 가운데 호리호리하고 강건한 삶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배가 나와있었다. G.W.라이프니츠가 1690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쓴 글중 "북부사람들은 이제 맥주에 '정신없이 푹 빠져'있지는 않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글은 아무래도 만취의 해악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으로 과장되게 썼거나 속단한 감이 없지않다. 그는 또 "만약에 우리의 선조가 살아돌아온다면 우리는 아마 그분들이 상당히 헐벗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것이다." 라고도 썼는데 이 문구에서 17세기의 독일인들이 과거 어느때보다 맥주를 많이 마셨음을 짐작할수있다.
1718년 작센과 폴란드의 세력가 아우구스트 왕의 마흔여덟번째 생일에 되호프 백작부인이 축하연을 베풀었다. 연회장의 뜰은 오색영롱하게 꾸며졌고 여인들은 양치는 처녀의 복장을 했다. 앵무새와 원숭이, 아프리카 흑인들도 볼거리로 동원됐고, 어느면으로나 바로크 시대의 풀요로움을 한껏 발산하고있었다. 그런데 당대의 이탈리아 궁정에서는 결코 일어날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 상황을 요한 미카엘 폰 레온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사람들은 왕이 있는곳에서 취하도록 마셨다. 갑자기 아무도 그 정원을 벗어날수 없다는 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작센쪽 조신들은 바르샤바에서 온 손님들이 테이블아래에서 술을 마시도록 했는데 이는 왕위가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이벌로 여겨지는 폴란드쪽 귀족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한 조치였다. 그처럼 만취할때까지 마셔본적이 없었던 폴란드인들은 이미 죽은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해져있었다. 그들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떨어뜨리고 걸음걸이는 바르지 못해서 결국엔 왕앞에서도 비틀비틀 걸었다. "
그 부하들이 이 나쁜 선례를 이어받았다. 다른나라에서는 독일인이라고하면 으레 뚱뚱한 술꾼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작센의 도나 백작은 교양과 매너를 갖춘 사람으로 외국에 나갔다가 이런 인식이 팽배해져있다는 사실에 깜짝놀랐다. 앙리 4세는 뚱뚱하지 않은 그를 마리드메디치에게 소개하면서 "자 보시오! 이사람이 독일인이라고 생각됩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실로 중부 유럽의 문명과 도덕성이 딸에 떨어진 시대였다. 헝가리의 여행가이며 동양학자였던 아르민 밤베리는 투르크가 비록 침입자이자 파괴자로서 비엔나를 공략했지만 독일인보다는 훨씬 문명화된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독일의 군주 가운데는 그러한 폭음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그런이였는데, 덕분에 베를린은 이 방탕한 시기에 일찌감치 좋은 평판을 얻을수있었다.
대 선제후로 불린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서방세계 군주가 지녀야할 최고의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의 치세는 30년 전쟁와중이었고 그 때문에 그의 지배력도 많이 훼손되었다. 그는 독일이 동족을 상대로 싸우느라 힘을 빼는동안 주변국들이 바다건너로 영토를 확장해가는것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네덜란드 역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으로서 번영일로에 있었다. 브란덴부르크와 스웨덴간에 벌어진 포메른 전쟁기간동안 네덜란드인 라울레가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위해 해군을 정비해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선제후는 소규모 편대를 재훈련시켜 아프리카 땅에서 식민지를 찾아보고자 기니 해안으로 보냈다. 선장인 폰 데어 그뢰벤은 그로스-프리드리히스부르크 항을 개설하고 황금해안에 브란덴부르크의 깃발을 꽂았다. 흑인 추장의 사절단이 베를린으로 찾아와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에게 경의를 표했다. 세네갈에도 식민지가 건설되어 암스테르담의 시기심이 이 초기 독일 식민제국의 싹을 잘라버릴때까지 수십년동안 유지되었다.
조그만 영토의 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먼 식민지로 이끈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권력욕이라기보다는 배들이 향신료들을 싣고 바다를 건너 되돌아올때 관세를 물지않고도 자국에 안정적으로 공급할수 있으리라는 믿음때문이었다. 서아프리카는 금,설탕, 원목, 야자유와 각종기름, 견과류, 타조의 깃털과 상아가 넘쳐나는 곳이 아니던가!
대선제후는 자국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제한적으로 생산되는것만으로는 만족할수 없었다. 특기할만한것은 베를린에 있는 그의 궁정에서 1670년 무렵 아주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선제후 자신과 왕비를 위해 네덜란드에서 커피가 수입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있었을 이 선제후는 네덜란드인 전의 코르넬리우스 분테쿠를 통해 커피를 접하게되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요절했지만 식이요법을 새롭게 확립하려고 노력했던 과학자로 당대 이미 명성을 얻고있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코르넬리우스 데커였다.
그의 고향 알크마르에서는 아버지가 얼룩암소라는 뜻의 분테 쿠라는 간판을 달고 여인숙을 운영했다. 그래서 친한사람들은 그를 본케쾨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며 그 자신도 과학서적을 출판할때 조차 이 별명으로 사인했다. 데카르트의 저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암스테르담과 함부르크에 들렀던 그는 연구결과를 가지고 산성과 염기성에 대한 새로운 화학적 결과를 담은 책을 썼다. 이 일로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안데어오데르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데카르트는 인강의 생각을 움직임으로 한 양식으로 간주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전재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관점을 요약했는데 이 철학적 개념을 뒷받침하는 생리학적 논거는 1619년 윌리엄 하비가 혈액순환에 대한 발견을 발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분테쿠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하비가 발견한 혈액순환은 당대뿐 아니라 수세기를 관통하는 위대한 발견이라고 거듭강조하곤 했다. 그도 그럴것이 하비 이전에는 누구도 몸속을 끊임없이 돌고도는 혈액이, 나일강이 이집트의 대지를 관개하고 영양을 전하는 것처럼 인체를 관개하고 영양분을 전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감탄할만한 특징은 그 순환이 시작과 끝이 같은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성의 타원궤도와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좌심실에서 뿜어져나온 혈액이 대동맥으로 들어가서 23초후에는 우심방을 거쳐 심장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혈액의 쉼없는 순환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얻게된다. 즉 인간의 본성이 그 어떤 식물보다 훨씬 활발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를 지배했던 전 지구적 갈망 역시 혈액순화의 발견과 연관되어있었다. 그 갈망은 바로 세계를 일주하고자하는것이었고, 지구상의 모든 부분은 타원의 교통로로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했다. 이 의사의 대담한 발견은 곧바로 대선제후로 하여금 항해와 외국무역에 더욱 몰두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분테쿠 자신은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되돌아왔다. 활발히 움직이지 않는 혈액은 건강하지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피돌기를 가속화시킬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커피와 차가 혈액의 이완을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와 차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킴으로써 생명기계의 활동을 자극할수있었다. 커피는 제동장치를 풀고 바퀴를 굴러가게하는 힘이었다.
분테쿠는 지나칠만큼 차의 음용을 권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초의학교본]에 이렇게 썼다. "전국적으로 또 범세계적으로 차를 마실것을 권한다. 남자나 여자나 매일같이 차를 마시는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매시간 마실것이며 처음에는 하루 10잔정도로 시작하여 점차로 위장과 신장이 허용하는 최대치까지 음용량을 늘려가는것이 좋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환자들에게 하루 50잔의 차를 처방하기도했는데, 베를린의 궁정에서 분테쿠가 꽤 많은 환자들을 저승으로 이끈것은 거의 확실해보인다. 그러나 어떤의미로는 유명인사들이 대부분 탄산이나 알코올 그리고 뇌졸중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던 시대였으므로 분테쿠의 그러한 처방은 긍정적인 측면이 충분히 있었다.
분테쿠는 서른여덟살에 생을 마감했다. 그역시 '차와 커피와 초콜릿의 사용에 의한 생명연장'이라는 자신의 처방에 대한 선전원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는것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실제 죽음의 원인은 사고였다. 1685년 1월 10일 그는 선제후를 위해 아래층으로 책들을 운반하다가 층계가 너무 어두워 비틀거리다가 굴러 떨어졌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타원궤도를 그리던 내부의 순환은 정지되었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수있었던 인물의 생애는 너무 일찌감치 마감되었다. 분테쿠의 죽음과 함께 베를린에서 카페인도 자취를 감추었다.
콜쉬츠키가 비엔나와 그 시민들을 위해 음료를 발견한지 고작 2년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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