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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농부, 상인, 황제의 커피 - 루이 14세의 탐욕

by 앤유 2021. 2. 5.

서유럽에 커피가 소개된 후 10년 동안 이 음료는 그저 기호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경제생활에서 커피가 맡은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비와 생산이 대량으로 증가하고서야 이 '기호품'도 어느 정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점차 커피는 중요한 상품이 되었고, 커피를 즐길 여유가 있는 국가와 군주들, 그들 밑에서 교역을 관장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커피를 대하는 태도는 나라마다 달랐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즉, 수로를 뚫어서, 새로이 역사 위로 떠오른 곳으로부터 밀려드는 이상품을 조절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는 홉사가 제시한 모델에 의거한 국가 분류 ─ 공화국, 입헌군주국, 전제 군주국─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사례(가장 성공적인 사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최초의 근대국가인 프랑스에서 썼던 조절 방식이다. 결국 파탄을 맞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전제주의야말로 국가주의 경제를 시도한 최초의 정부 형태였다. 

 

루이 14세 시대, 프랑사의 경제 감독관은 콜베르였다. 철학자들과 개혁가들은, 특히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특정 목표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원하지 않은 것들을 피하려다가 의외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콜베르가 건설하고자 했던 강대한 산업국가로서의 프랑스가 그랬다. 스페인처럼 되는 것을 피하려다가 네덜란드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발견과 귀금속의 대량 수출에 의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지구의 절반을 장악하는 헤게모니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도 못 가서 금과 은이 바닥났다. 세속적인 데는 관심이 없고, 야윈 몸에 고행자 같은 표정을 한 스페인 대공들은, 금이나 은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악전고투하는 노고를 경멸했다. 능력 있고 성공한 스페인 상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수는 매우 적었다. 스페인 상인보다는 정복자(conquistadore)─탐욕스럽고 포악한 약탈자─를 훨씬 많이 배출했다. 인간은 자신과 친밀한 교분을 쌓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하기가 더 용이한 법이다 '재테크의 열매(frutti di arte moneraria)'라고 하는 원예적 은유는 오로지 이탈리아에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생각하기에 품위 없어 보이는 일에는 기분 좋게 몸을 놀려 헌신하지를 못했다. 이를테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는 일 같은 것이 그랬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아마도) 뜻하지 않게 아메리카를 발견한 덕분에 신대륙에서 엄청난 부가 쏟아져 들어오자, 거기까지도 자신이 귀족인 줄 아는 이 나라에서는 그 부의 가치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혹시라도 차후에 육체노동이나 피곤한 정신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다. 결국 이들 코트족과 이베리아 반도의 후예들은 힘써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일하기보다는 싸우거나 구걸하고자 했다. 다른 민족을 약탈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굶는 편이 적성에 맞았다.

 

스페인의 사례에서 콜베르는 노동의 배제된 부는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한 북으로 눈을 돌려서는 그 반대의 사례로서 부지런한 네덜란드인들의 행복을 보았다. 이 사람들의 행운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그로 인해 큰 강을 차지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그거 네덜란드가 부와 권세를 거머쥐게 될 것을 알려주는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장점과 행운은 그들이 제조업자인 동시에 무역업자였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콜베르가 보기에 프랑스의 국가적 특성은 네덜란드가 가진 장점과 여러 모로 같았다. 프랑스인들은 지나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부지런했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재주가 뛰어났다. 특히 수공예에 관한 한 자신들보다 더 정교한 손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 손이라면 강철로도 비단을 짤 수 있을 법했다. 콜베르는 확신을 가지고 산업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다. 제조업은 단지 수출로 이윤을 얻는 것뿐 아니라 가난의 주요 원인인 실업이라고 하는 프랑스 전반에 만연한 병폐의 치유책도 될 수 있었다. 불모지에 공장을 건설하면 '가난하지만 게으름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위한 일자리가 창출'된은 물론 풍요로움을 이끌어내는 대량생산의 전진기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콜베르의 실수는 '국가적인 생산'이 전제군주의 배만 불리는 곳에서 공공의 안녕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일이었다. 그중 최대의 불운과 비극은 그가 너무나도 근시안적 시각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당대의 모든 관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콜베르도 저자세로 군주를 대했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라고 하는 주앙이 콜베르에게는 전혀 과장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자연법의 표현과 같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그에게 왕은 비상사태 때마다 위기를 물리치는 탁월한 지적능력을 가진 완전한 존재였고, 국가를 상징할 뿐 아니라 진실로 국가 그 자체였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반신반인의 존재 파라오와 같았다. 콜베르는 아첨을 일삼는 노예근성이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진심 어린 충정에서 루이 왕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 "왕 이시어, 저는 날마다, 당신의 의지로서만 그 권세의 끝을 이야기할 수 있는, 태양처럼 위대한 폐하의 통치하에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결국, 꾸준한 외화의 유입을 보장할 수 있도록 수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수출을 최대한 증대시키는 상업 정책이 가장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인정받아 수립되었다. 곧이어 자국 내의 상품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모든 도시의 관문과 강의 교차점에서 징수하던 내국세를 폐지하고, 국경의 통행세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더불어 프랑스에서 생산 가능한 모든 품목에 대해 수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탈리아나 플랑드르에서 제조된 것들도 반입 금지되었고, 간혹 수입의 전면 금지가 불가능한 품목이 발견되면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생산되지 않은 물품에도 통행세를 물렸다. 열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에도 세금이 매겨졌는데, 그 점은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중상주의의 견지에서는 세상은 오만가지 상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상주의는 겉보기에는 '실용적 사고'와 거리가 먼 전제정치의 관념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 본질적인 관념은 국가경제를 국가 간의 무역에 의해 상호 교류하는 세계경제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콜베르는 전제 주의자라기보다는 중상주의자였다. 그가 커피에 대해 높은 수입관세를 부과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후에 피히테가 목소리를 높였던 것 같은 국가 계몽적인 기질은 전혀 없었다. 또한 루이 14세의 재정장관으로서,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로서의 커피에 대해 의사들이 내놓는 부정적 견해나 그들이 벌이는 캠페인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 당국이 포고한 칙령에는 커피가 건강에 유익한 음료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일상품의 하나가, 그게 무엇이 됐든 팔아서 국고에 보탬이 되는 거라면 굳이 유해하다는 선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크 시대의 절대왕정은 정치력이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고, 국가의 경제력 또한 전매의 형태로 집중시켜 좌지우지하고자 했다. 전매는 물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물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소비만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국가재정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매권은 국가가 직접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에게 팔아야 제대로 운영되었다. 

 

전매권의 판매는, 특히 중상주의 국가가 전쟁에서 패하여 급하게 돈이 필요해질 때면 거의 필요 불가결한 선택이 되었는데, 1692년의 프랑스가 바로 그런 처지였다. 라오그 해전이 펼쳐지는 동안 투르빌 장군 휘하의 프랑스 함대는 러셀 장군과 반 알레몬드가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대패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로부터 이틀 후 루크 장군은 프랑스의 군함 13척과 수송선 몇 척을 추격하여 격침해버렸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작센이 연합한 대동맹군의 팔츠에서 멜릭 장군의 군대에게 유린당한 복수를 하고 있었다. 루이 왕은 전쟁수행을 위한 군자금 때문에 목이 탈 지경이었다. 콜베르는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만 살아 있었어도 당시 프랑스의 군주가 재정난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전매권을 판매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복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커피가 전매가 공표되었고, 은행가로 알려진 파리의 부유한 시민 프랑수아 다망에게 그 권리가 낙찰되었다.

 

국가가 개인에게 커피의 전매권을 양도한 이 최초의 사례는 문영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루이가 쓴 칙령의 앞부분에는 "커피의 판매와 공급에 대한 지불의 이행"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일종의 전문에 해당할 이 글귀에는 실제로 왕이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칙령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폐하께옵서 국가 평회 의의 권고를 들으신 후에 프랑수아 다망 공에게 큰 특전을 베푸 시었으니, 그에게 1692년 1월 1일부터 3년 동안 커피, 차, 초콜릿 및 이런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식품, 즉 코코아 바닐라 등의 판매권을 부여 하노라. 이는 또한 모든 주와 도시를 포함하여 프랑스의 통치권이 미치는 전 영토에 대한 것임을 밝히노라.

 

─전술한 날로부터 다망 공은 이 교섭의 모든 열매를 향유할 권리와, 그의 특권이 승인되고 시행되는 것을 확인할 권리, 또한 자신의 의지와 만족에 따라 중개권을 부여하고 종업원을 고용할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위대한 기독교의 수호자인 폐하 께옵서는 그 외 다른 자의 이 사업에 대한 참여를 금하시며, 다망 공의 특별한 허가가 없이 전술한 상품의 도매 혹은 소매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하노라.

 

─위대한 기독교의 수호자인 폐하께옵서 명하노니, 커피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상인과 가게 주인들은 원두나 가루를 막론하고, 차나 초콜릿을 포함한 일체의 상품이 상점에 비치되어 있을 때는 전량을 즉시 반납해야 한다. 회수된 상품들은 다망 공의 사무실에서 무게를 재고, 조사하고, 표시를 하고, 라벨을 붙여 봉할 것이며, 그런 연후에 안전한 창고에 보관될 것인즉, 커피와 차 및 기타에 대한 공고와 관련하여 이 칙령을 어기나 회피하는 자는 주인과 종업원을 막론하고 1,500 리브르의 벌금을 내야 하며, 고발인에게 3분의 1을 포상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다망 공에게 양도될 것이다.

 

─폐하께옵서는 마르세유와 루망 외 다른 항구로 들여오는 커피, 차, 초콜릿의 수입을 금하시며, 그러한 품목이 전리품으로서 압류되어 있을 경우에만 가장 가까운 항구를 통해 육로로 운송되는 것을 임시로 허용할 수 있다 하신다. 그러나 폐하께옵서는 전술한 상품을 어떤 식으로든 왕국 내로 밀반입해 들여옴으로 써 다망 공에게 손실을 입히는 행위에 대해 엄벌할 것이다.

 

─폐하께옵서 다망 공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전술한 품목들 중 어느 것이라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를 옮기기 위해 마차와 수레, 나룻배를 세내거나 소유하는 일을 금하시며, 이를 수행하는 짐꾼을 사는 것 역시 금지 대상에 포함됨을 밝히시노라. 누구라도 허가 없이 이와 같은 행위를 할 때는 물품의 압수는 물론 말과 마구, 운반구와 수레, 나룻배도 마찬가지로 몰수될 것인즉, 모든 상인과 상점주들, 식료품 업자들은 이들 품목의 적재와 운송에 대한 명세서를 작성하도록 하라.

 

─나아가 폐하께옵서는 다망 공에게 본인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수의 유급 종업원을 고용할 권리를 내리시니, 이는 전 국토의 성시, 각종 견본시와 시장, 군대의 주둔지와 막사, 그리고 궁정과 폐하의 거처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밝히노라. 이 피고용인들은 전술한 음료의 판매와 공급에 투입되며, 폐하께서 내린 특전의 임차인이 고용한 종업원들과 똑같은 특전을 누리게 될 것이다.

 

─커피는 귀리, 완두, 콩, 기타 작물과 혼합하여 판매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차와 코코아, 초콜릿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반드시 순수한 상태로만 판매할 것을 명한다. 누구든 혼합물을 섞어 파는 자는 태형에 처하고 벌금 1,500리브르를 물게 될 것이다.

 

─위대한 기독교의 수호자인 폐하께옵서 이 칙령을 엄히 발포하시니 파리 시장 드 라 레이니 중령과 영토 내의 모든 지방관들은 이 칙령이 어느 곳에서나 큰 소리를 읽히고, 인쇄되고, 게시되어 그 제반사항이 준수되는지 살피기를 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