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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농부, 상인, 황제의 커피 - 네덜란드의 자바 커피 ⅲ

by 앤유 2021. 2. 4.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에게 부를 가져다준 핵심 상품은 단연 커피였다. 북해 연안 저지대에 이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순다 제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커피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식품이었다. 그거 아랍인들이 자신들이 마시려고 얼마간 들여오기는 했으나, 그걸 말레이 제도에서 재배하게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커피플랜테이션을 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낸 사람은 네덜란드인 인 빌렘 반 아우트보른이었다. 그전까지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인도인들에게서 음용법을 배워, 차를 마심으로써 각성효과를 얻었고, 알코올성 음료로는 아라크 술과 야자 주를 마셨다.

 

1690년 아라비아해 해변에 닻을 내린 네덜란드의 뱃사람들은 커피 관목의 가지 몇 개를 잘라냈다. 그들은 호기심에 그걸 암스테르담까지 가지고 가서 온실에 심었는데, 의외로 식물 전문가들이 손뼉을 칠 만큼 무성히 자라났다. 그러자 자연히 가지를 열대기후로 가지고 가서 심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생겼고, 이 식물은 배에 실려 아라비아에서 바타비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커피 관목의 가지는 습기 많은 다공성의 흙 속에 뿌리를 내렸다. 오랫동안 커피의 이민을 기다려오기라도 한 듯 순다 제도의 흙은 커피 관목의 수를 순식간에 수백 배로 늘려놓았고, 그 나무 하나하나가 풍성하게 빠른 속도로 자라서 가득 열매를 맺었다.

 

일이 이쯤 되자 예기치 않았던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향기로운 음료의 원료가 되는 이 아라비아의 식물이 '향신료의 제도'에서 나는 여러 향신료에 또 한 가지 품목을 첨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구매자들이 이 시장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1696년 초, 파리의 주간지 <메르퀴르 갈랑(Mercure galant)>은 아랍인들의 레반트 커피 무역이 불변의 진리인 양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커피는 메카의 이웃 지방에서 수확되어 제다로 운반되고, 거기서 선적되어 수에즈로 갔다가 낙타 등에 실려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진다. 그러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이집트 소유의 창고에서 프랑스와 베니스의 상인들이 자국의 소비자들에게 제공할 커피콩을 구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 후, 아라비아는 제2의 커피 생산지를 마련했다. 수에즈를 경유하는 지름길을 포기하고 희망봉을 우회하는 먼 항로를 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물을 선적하는 배는, 당시 어느 나라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선박이었다. 이 네덜란드 선박의 화물칸에 실려, 커피는 바타비아에서 로테르담으로 운반되었다. 바로 이 해(1700) 이래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커피의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열렸고, 그 시절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견고하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게르만의 후예인 튜튼족 이민자들은 열대와 아열대 지방의 점령(예를 들어 아프리카 북쪽 해안에서의 영국적인 정착)에 실패했으나, 북서쪽의 튜튼족이 말레이 제도에서 이를 성취했다. 사실, 적도 하늘 아래에서 거주하던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근면한 습성을 포기하고 지내야 했다. 고향에서처럼 출근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뜨겁기 그지없는 기후에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열대 풍토에 잘 적응된 바싹 마른 몸매의 말레이인들과 자바인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신해 일을 했다. 네덜란드인 주인들은 모국을 연상시키는 주택을 열대 기후에 맞게 수정해 건설했다. 집의 벽체는 돌로 지어졌고 널따란 베란다가 마련되었으며, 버섯모양의 돌 지주가 받치고 있어서 뱀이나 들짐승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마루와 지면 사이로 공기가 잘 통하게 되어 있었다. 이 집은 단지 거주용으로만 이용되었다. 부엌이라든가 욕실, 창고 등 더러움이 탈 수 있는 공간은 바깥에 지어진 별채에 있었다. 비가 자주 내리는 우기 동안에는 별채로 가는 길에 천막을 쳐서 오갔다. 벽에는 아무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림은 물론 벽의 벽면을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배제되었는데, 그것은 거미나 모기 같은 해충이 집을 짓거나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방편이었다.

 

백인 주인나리들은 단지 몇 시간 동안만 섬을 휘젓고 다녔다. 나머지 시간은 주로 등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누워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보냈다. 그러면서 그들은 늘 뭔가를 먹어댔다. 그러나 열대지방에 사는 백인들에게 딱 알맞은 먹거리가 부족한 듯했다. 그곳에는 그들이 모국에서처럼 마음껏 식탐을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른함이 밀려올 때 퇴치할 수 있는 수단은 있었다. 마호메트가 일찍이 극찬해마지않았던 그 음료! 네덜란드인들은 커피를 장사 수단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커피의 수요자이기도 했다. 라인 강과 스헬데 강의 어귀에서 태어나 자라난 이들 둔중한 몸집의 자손들은 모국에서도 그러했거니와 열대지방에서도 커피를 즐겨 마셨다. 이 음료의 마술적인 효과는 북쪽 지방에서는 몸을 데워주는 역할을 했고, 열대지방에서는 기후에 적응이 안 되어 쉽게 지치는 백인들의 무기력증을 해소해주었다. 물론 커피 외에도 즐겨 마시는 음료는 있었다. 금발의 건장한 북유럽인들에게 맥주는 빠뜨릴 수 없는 기호식품이었다. 커피를 적재하고 남쪽과 서쪽으로 나아갔다가 희망봉을 돌아 북쪽 네덜란드로 항해했던 선단은 종종 맥주를 실은 외항 선박들과 만나곤 했다. 북해 연안 저지대의 맥주만이 열대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그 맛을 잃지 않았는데, 바로 돈 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과 친척들이 특별히 열대기후에 맞춰 조제한 브런즈윅 맥주가 그것이었다. 그럼 처음 이 맥주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독일의 한 화학자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그해, 크리스티안 멈이라는 한 독일인이 열대의 열기를 이겨내는 맥주를 양조해보고 싶어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지금까지도 발명자 이름을 따서 '멈(Mumme)'이라고 부르는 이 맥주는 진하고 단 맥아 주였다. 양조된 맥주는 양철로 안을 댄 통에 저장되었고, 덕분에 안전하게 선적되어 운반되었다.

 

이것이 커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자유로운 향이 노예노동의 짙은 땀 냄새와 섞여 피오르는 장면이었다. 일찍이 해발 3,000피트의 고지대에서 '영원한 각성의 열매'를 지배했던 아라비아 농부는 자유인이었고, 아르델 카데르는 "오! 커피여!"라고 소리치며 이 성스러운 음료에 대해 돈 호법을 구사했었다. "너, 알라의 친구이자 슬픔의 추방자여! 너는 건강함과 지혜와 진리를 불러오며, 마치 금과 같아서 너를 얻을 수 있는 곳 어디에서나 훌륭한 사람이 발견되도다!"

 

그러나 커피는 이제 또 다른 형태의 금이 되어, 지구상에 노예를 양산해내게 되었다. 과거 자신들의 원주민들을 위해서만 노동하도록 강요되었던 말레이인들은 이제 그 고난이 두 배로 커졌다.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의 군주들을 협박하여 경작 가능한 땅을 임차했고, 임차 조건에는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원주민 어쩔 수 없이 무자비한 주인에게 이중으로 얽매이는 몸이 되었다.

 

가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인들처럼 원주민 군주들도 많은 돈을 모으는 일이 있었다. 18세기 초는 서유럽 전체에 걸쳐 문학과 풍습 때문에 커피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넘어섰던 시대였다. 이에 따라 가격 상승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네덜란드와 이슬람 국가의 군주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재배되는 커피에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자마자 가격 폭락에 대한 오래된 우려와 과잉생산 때문에 네덜란드의 농장주들은 커피 작물을 제 손으로 폐기해버렸다. 원주민들로서는 그 차이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 눈에는 주인 나리들의 이 식물에 대한 분노가 너무 심한 나머지, 열매가 익기도 전에 관목을 잘라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악마를 몰아내듯 뿌리까지 파헤치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리하여 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커피 살해의 범인이 되었고, 새로운 공포는 말없이 커피 관목의 열매가 되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감고 쓰디쓴 열매가!

 

과거 네덜란드가 조수처럼 밀어닥쳐서 포르투갈을 쓸어버린 것과 같이, 새로운 조수의 물결이 바다 저편으로부터 일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강자 네덜란드 귀에 들려왔다. 대양에서는 트리톤의 탄생이 임박해 있었다. 마침내 북해가 몸을 풀고, 차기 바다의 패왕(육지도 포함해서)이 될 영국이 북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 젊은 바다의 거인은 네덜란드의 해상 패권에 신속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젋다고는 하나 저지대 민족보다 두 해나 먼저 동인도회사를 건설했던 이거 대한 바다짐승은 이제 네덜란드와 정식으로 맞섰다. 1651년 항해조례가 단단히 조여들고 있었다 "외국 선박에 적재된 외국산 제품은 영국 항구를 통해 운반될 수 없다!"

 

이것은 네덜란드령 식민지의 상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해진 타격이 아니라 암스테르담의 해상운송업에 내려진 타격이었다. 항해조례의 보호 아래서 영국의 조선업은 엄청나게 힘을 얻었다. 그들은 이미 옛날의 '평화로운 무역업자'들이 아니었고, 상선에는 무기가 장착되기 시작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 사이의 먼 항로에서, 한편으로는 희망봉을 도는 항로에서, 그 다음에는 인도양을 가로질러 말레이 제도로 가는 항로에서 해전을 그치지 않았다. 자바의 창고에는 커피가 나날이 쌓여갔지만 해로를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운반해 가기에는 너무나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았다. 평화의 기미가 보이자마자 축적된 재고물량을 없애버리라는 특명을 받은 날랜 증기선이 로테르담에서 바타비아로 급파되었다. 포화상태가 된 유럽시장의 가격 하락이 목전에 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회의실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열대우림의 눈부신 태양 아래 살던 농장주들은 유럽의 환시세를 믿지 않았다. 그전에 감독관의 지시에 복종하던 사람들이 이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은 또다시 힘들여 재배한 작물을 폐기하라는 명령에 대해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이 킬 것을 두려워한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부라는 것은 상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지 교환의 매개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그들은 곧, 엄청난 양의 커피를 배에 실어 암스테르담 시장으로 보냈다. 가격은 맹렬하게 추락했고, 중개상들은 파산했다. 1782년 네덜란드에서처럼 커피 값이 쌌던 적은 그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