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와 더불아 근대가 시작되었다. 1949년 콜럼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떠났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이 해에는 바스코 다 가마도 남으로 항해를 떠나 아프리카를 우회하다가 인도로 가는 동부의 항로를 발견했다.
인도! 중세 유럽인들은 아랍 대상들을 통해 페르시아, 인도와 교역하는 것에 만족하며 지냈다. 그 후 베니스 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지중해를 통해 교역했으나, 곧이어 투르크가 유럽과 동방 사이에 커다란 장벽을 만들자, 레반트와의 교역은 한층 위험해지면서 급격히 감소했다. "어떻게 하면 투르크의 장벽을 피해 우회할 수 있지?" 서방에서는 이런 불만이 새어 나왔다. "예전처럼 투르크를 공격하지 않고 동방에서 향신료와 금을 들여올 수 있는 길은 없는 건가?" 이런 의문은 제노바의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원정대를 발대 시킨 동기가 되었다. 6년 뒤,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것도 같은 목적이었으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사자의 피부처럼 황갈색의 메마른 아프리카, 그 거대한 대륙을 일주하여, 산과 사막과 밀림을 돌아서 아라비아로부터 남으로 뻗은 바다로 향했다.
그것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유럽의 기독교들, 즉 십자가를 받드는 이들이 이슬람교들의 뒤꼭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스코 다 가마의 이 원정과 그 성과에 별다를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기적에 이미 단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세기 전에 동방의 제국을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머나먼 서방 끝에서 포르투갈이 무적함대를 보낸 것과 같은 청천벽력이었다. 메카에는 어마어마한 경종이 울렸다. 성도의 항구인 지다에서는 허둥 지둥 방파제를 만들어 방비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의 수도를 공격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라비아를 그대로 내버려돈 채 인도 대륙에 상륙하여 조공을 거두고, 다시 동쪽을 향해 항해를 계속할 따름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미지근한 바다의 세상의 조각이 흩어져 있는 듯, 여러 섬이 한데 어우러진 군도에 이르렀다. 그들이 발견한 곳은 자잘한 섬들과 환초, 암초가 구름처럼 둘러싼 큰 섬, 수마트라, 자바, 셀레베스였다. 인도의 인도, 과일의 정원, 천국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닻을 내렸다. 그들은 말레이 군도를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주인인 셈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모험정신이 지구 상에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리스본의 명성을 드높이는 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서쪽에 자리한 새로운 대륙으로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구형의 지구에 여백은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즉 서쪽으로 끊임없이 항해를 해나간 나라와 동방을 향해 꾸준히 나아간 두 나라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조우할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두 기독교 국가 사이에는 시기와 적개심이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는 사태의 중재를 교황에게 의뢰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지구를 둘로 나누었다. 이때가 1493년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여전히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고(콜럼버스가 다다른 곳은 서부 인디언 도서에 국한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것도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결국 1493년 5월 4일, 교황은 교서를 내려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의 서쪽 100 리그 지점에 자오선을 긋고 그 서쪽은 스페인에게, 그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정복'할 권리를 주었다. 포르투갈은 이 분할이 부당하다고 들고일어났고, 이듬해인 1494년 6월 7일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오선은 서쪽으로 270 리그 옮겨졌다. 이 때문에 이른바 '교황 자오선'은 서경 50 도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남아메리카 대륙이 그들의 관심권으로 들어왔고, 아마존의 입구에서 푼토 알레그로에 이르는 브라질이 토르데시야스 자오선의 동쪽으로 위치하게 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이 지니게 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 지역이 얼마나 대단한 파워를 지니고 있는지는 요한 3세의 치세였다 1532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스페인은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지휘 아래 남과 북을 막론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식민지 확장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면서 교황이 스페인의 권리로 인정한 필리핀까지 침략해 들어갔다. 반면에 포르투갈은 말레이 군도의 공략에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해, 포르투갈 서정시인 카모 엥시가 『루시아즈(The Lusiads)』 에서 염원했던 동인도 제국의 건설의 꿈도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사실 포르투갈의 선단과 항해자들은 말레이 군도에 도착한 최초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수마트라, 자바와 여러 섬의 원주민들은 이미 몇 차례 외국의 지래를 받은 뒤였다. 일찍이 3세기에 갠지스 강 유역에서 온 힌두교도들이 말레이 제도를 양분하여 인도의 신들이 지배하는 두 제국 마자파히트와 슈리비자야를 건설했었다. 이때 힌두의 건축과 시, 음악도 함께 도입되었다. 지력이 어린아이보다 조금 나운 수준이었던 원주민들은 벼를 재배하는 법과 밭작물을 키우는 법을 이들에게 배웠다. 농사는 저녁 하늘에 북두칠성(the Plow)이 떠오르는 시기, 즉 12월 15일에 시작되었다. 이 일곱 개의 별이 하늘에서 쟁기질을 할 때가 열대지방의 농부들이 일하기에 알맞은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힌두교도들은 말레이족과 자바인들에게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그것은 물물교환이었는데, 그 덕분에 순전히 자발적으로, 속이거나 속는 일 없이 상품을 다른 상품과 바꿀 수가 있게 되었다. 새로운 염색 기법도 등장했다. 녹인 밀랍을 흰 리넨 위에다 부었다가 숙련된 기술로 밀랍을 떼어내면, 밀랍이 붙어 있는 곳을 제외한 다른 부분만 염색이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완성된 '원색의 천'은 지금도 '바틱(batik)'이라는 말레이 이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런 시굴이나 기법은 순진한 원주민들은 기쁘게 했지만 인도의 군주들이 과중한 인두세를 부과하자 그들의 웃음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저항은 불가능했다. 우선 무기가 정복자들에 비해 너무 낙후되어 있었고, 다음으로는 막강한 힘을 지닌 인도의 신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일례고, 원주민들은 지혜와 행운을 관장하는 코끼리 형상의 신 가네사가 평상시에는 앉은 자세로 코를 평화롭게 한 방향으로 감고 있지만, 일어서서 코를 들고 나팔 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날엔 자바와 수마트라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천년 후, 힌두 신의 치세는 와르르 붕괴되었다. 훨씬 강한 신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교역상들을 따라서 이 나라로 들어온 새로운 신은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다른 신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알라! 알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했다. 이 신은 하늘 끝에서, 땅속 깊은 곳에서, 숲과 정글에서 일시에 공격해 들어와 코끼리와 신의 브라만의 사원을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종교전쟁의 불길은 자바와 수마트라를 황폐화시켰다. 새로운 마호메트 왕국이 건설되어 낡은 왕국과의 전쟁을 이끌어갔다. 말레이 군도의 부에 관한 소문을 듣고 해적들도 쉴 새 없이 침략해 들어왔다. 인도양, 아라비아 해, 페르시아만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전설에 사 존재하는 파라다이스로 비쳤다. 중국인들도 찾아왔는데, 이들은 깜짝 놀랐다. 북풍이 불 때 역으로 정크선을 타고 수주일 동안 남으로 항해해 이 섬들에 도착한 그들의 눈에는 마을과 산이 고향과 너무 똑같았던 것이다. 이 화산지대에서는 해저 수로가 이리저리 복잡하게 뻗어나갔다. 그 때문에 많은 섬들이 1년씩 보이지 않거나 아예 사라져 버리고, 또 새로운 섬들이 나타나곤 했다.
1510년의 어느 화장한 날 아침, 중국의 작은 함대는 원주민들에게 정향나무의 위탁판매를 의뢰받은 아랍 교역선 그리고 원주민 해적선과 마주쳤다. 거친 말싸움이 오간 뒤 이들 세 집단은 누가 물건의 주인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내려온 황색 피부의 사람들과 연갈색 피부의 아랍인들, 그리고 진갈색 피부의 원주민들은 곧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흰 돛을 단, 거대한 바닷새를 닮은 커다란 배가 서쪽에서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풍당당하게 전진해 오는 그 배는 다름 아닌 포르투갈 함대였다.
이들, 말레이 군도를 찾아온 최초의 유럽인들은 정향나무보다 더 큰 것을 훔쳤다. 향기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들의 콧구멍은 탐욕으로 팽창되었다. 마치 스페인이 서쪽으로 '황금의 섬'을 향해 항해해 갔듯이 포르투갈은 동방의 '향신로의 섬'으로 진출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금과 향신료가 같은 비중으로 취급되었다. 후추를 금으로 바꿀 수가 있었으며, 육두구 씨앗은 몰루카 섬(이 섬은 지금도 향신료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에서 다른 곳의 20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1517년 아라비아 전역을 정복한 투르크 제국의 확장으로 사업상 타격을 받았던 아랍 상인들은, 또 다른 지역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된 셈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지중해 연안으로 상품을 운송하는 데 있어서 베니스라는 무서운 라이벌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우회하는 보다 저렴한 해상 수송로를 통해 동아시아의 상품을 유럽으로 날랐다.
이 지역의 군주들은 전쟁의 와중에 있었으므로 이들 강력한 이방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를 빌미로 중화기로 무장한 포르투갈인들은 치안을 장악하고, 그들 자신의 교역기지를 구축했다. 곳곳에 보루가 세워졌다. 1522년 그들의 향신료 매매를 독점했을 뿐 아니라 티모르 섬 같은 곳에서는 백단목까지 취급했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이 향기로운 나무를 종교적인 목적으로 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백단목을 가득 선적하여 북으로 날랐다.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교황에 대한 충성을 거두고 프로테스탄트의 분리를 선언한 바로 그 시기에 카톨릭교는 동방에서 수백만의 말레인을 신도로 확보했다. 회계장부와 머스켓 총 위로, 포르투갈 갤리선에는 십자가 높이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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