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먼 동방의 나라에서 교역과 통치권을 쟁취하는 일에 매진하던 식민 개척자들은 조국에서 심각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거대함이 정점을 넘어섰던 것이다. 정복자들에게 그 뉴스는 멀리서 시작된 지진의 굉음처럼 다가왔다. 국가적 영웅인 바스코 다 가마, 안토니오 아브레우, 알부케르케가 싸워서 이룩한 리스본의 파워는 쇠퇴 일로에 있었다. 먼바다 위에서 과소모된 포르투갈의 에너지는 고갈 위기를 맞았다.
몇십 년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의 힘이 그토록 넓게 퍼져 있던 말레이제도에 또 다른 국적의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해상제국은 남쪽 대양 전체를 주름잡으며 확장을 거듭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함대는 다다른 곳 어디에나 머무르고 싶어 했다. 그들은 활기 넘치는 포르투갈보다는 훨씬 인내심이 강했다. 생각의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성과 집중력이 탁월했다. 그들의 선조는 튜튼족이었고, 라인 강의 삼각주 및 그 아래쪽의 스헬데 강과 뫼즈 강 유역에서 생활했다.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한 국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고, 이마에 드리워진 금발을 뒤로 빗어 넘기고는 서둘러 함선을 진수시키기 시작했다. 신체 못지않게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한 터라, 얼마 되지 않아 네덜란드 사람들은 무족의 항해자이며 해상 전사가 되었다. 로테르담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조선공의 망치질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건조된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조선대를 연이어 통과해 바다로 나아갔다. 기독교의 유럽이 투르크 앞에서 전율할 때도 네덜란드는 술탄을 빨리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안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홍해를 통해 술탄을 공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폐한 독일이, 비엔나의 공성을 푸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안, 유럽의 부과 권세는 북쪽으로 흘러가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항구인 암스테르담에 쌓이고 있었다. 1683년 비엔나가 투르크에게 포위되던 해에 서방세계의 권력을 쥔 세 국가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는 모두 합쳐 2만여 척의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네덜란드가 1만 6,000척을 차지했으며, 영국이 3,500척, 프랑스는 500척을 넘지 않았다. 만약 네덜란드가 마음만 있었다면 동으로부터 이슬람으로 쳐들어가 시대 변화에 뒤처진 중부 유럽을 대신해 오스만 제국을 공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배는 희망봉을 돌아 페르시아만과 인도제국으로만 항해했다. 아라비아를 공격하거나 초승달 제국의 권세를 뒤흔드는 것에는 무심한 채로.
그들의 목표는 인도, 말라카, 자바였다. 그들은 포르투갈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어 했다. 오래지 않아, 말레이 군도의 요새 위로 펄럭이던 포르투갈의 깃발은 네덜란드의 깃발로 대체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수마트라, 셀레베스, 말라카에 내렸을 때, 그들은 전에 포르투갈인들이 그랬듯이 자신들이 신세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이들 멋진 도서들은 육지와 물을 여러 색으로 혼합해놓은 따사로운 천국이었다. 부드러운 수평선은 영원히 육지와 맞닿지 않을 듯했다. 이쪽에 원뿔 모양의 섬들이 솟아 있는가 하면 저쪽에는 연이은 산등성이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한껏 무르익은 채 경사면을 붉은, 초록의, 황금빛 물속으로 담그고 있었다.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향기로운 거품이 이는 물 냄새가 항해자들의 코를 간지럽혔고, 눈앞에 펼쳐진 원시림에는 이국적인 포유류와 파충류, 조류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무릇 미지의 섬에 사는 원주민들의 삶은 자족적인 법이다. 에덴동산처럼 자연은 사람의 수고를 바라지 않고 제 몸의 과실을 너그럽게 내주었다. 공기의 신은 나무를 키웠고, 나무는 끝 모를 높이로 서서 생명력 넘치는 덤불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바람은 거목들의 씨가 사방으로 뿌려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무성한 망고나무, 풍성한 그레이프푸르트, 넘쳐나는 야자, 그 사이사이로 윤기 흐르는 빵나무가 서 있었다. 냄새가 꽤 고약했지만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향기로운 가시 돋친 열매 두리안도 있었고, 코코스야자도 매우 풍부했다. 수마트라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나무에 기어 올라가 이 커다란 열매를 따서 던지도록 했다. 대추야자, 바나나, 석류 등 수많은 과일나무들이 재배의 수고로움 없이 자라났다.
앞서 말했듯이 자바인들은 일찍부터 숙련된 벼농사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습하고 뜨거운 말레이 군도의 토양은 아프리카의 해로운 늪지대와는 달랐다. 자바의 기후는 영원한 여름이었으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수많은 섬들의 꼭대기에는 인도양의 표면에서 날아오른 수증기가 모였다가 시시때때로 비가 되어 내렸으며,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숲의 부식토를 적시고, 화산 주변의 영양 많은 광물질들을 떠내려 보냈다. 산길슭은 계단식으로 개간되어, 인공수로와 보를 통해 물을 끓어대고 있었다. 이 갈색의 변화무쌍한 경치 속에서 몬순의 묵직한 회색 비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벼를 무럭무럭 자라게 했다. 옮겨심기 전 묘상에서 벼의 어린싹은 에레멀드그린의 네모진 구획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구릉지대의 보랏빛 배경과 강한 대조를 이루어 네덜란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쉴 새 없이 땀을 흘러내리게 하는 기후만 아니라면, 마치 모국 네덜란드 해안 간척지의 비옥한 녹색 땅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섬과 섬 사이에는 사악함과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무고사리들이 우거진 한복판에는 파괴적인 패권의 상진인 유리질의 검은 흑요석 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혹은 수백 년 동안 정지해 있던 부화구가 유황 섞인 담황색의 연기를 뿜어내고 있거나! 이곳 전역을 창조했던 화산의 신은 언제든 마음 내키면 다시 파괴해버릴 수 있는 변덕의 소유자였으며, 실제로 지진을 일으켜 땅덩어리를 뒤흔들곤 했다.
자바에서 신은 따뜻한 액상의 진흙으로 호수를 만들었다. 포리지 같은 연청색의 젖을 연상케 하는 물질이 거대한 산의 가마솥에서 끓고 있었다. 이들 가마솥에서 날아오른 증기의 한복판에서 허우적대던 새들은 떨어져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화산이 새들을 삼켜버렸다"라고, 원주민들은 고통을 참으며 맨발로 뜨거운 바위 위에 서서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밑창을 두껍게 댄 가죽장화가 있었기 때문에 발을 델 일은 없었다. 그들의 푸른 눈은 흔들림이 없었고, 어떤 끔찍한 광경에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무엇도 꿈꾸지 않았고, 그 점에서 다른 모든 민족과 확연히 달랐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확고한 행동을 취할 때면 으레 그 목적을 자신들의 꿈과 버무려 더 큰 정신적 힘을 얻고자 했는데, 네덜란드인들은 그렇지 않아다. 그들은 세계 정복의 꿈이라든가, 기독교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종교적 꿈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오로지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그들은 음습하고 무거운 암스테르담의 하늘 아래에서 성장한,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마인히어들로서, 계산적인 민족이었다. 항구의 소음은, 세상의 거대함을 상징하는 듯한 길고 텅 빈 탁자가 놓인 그들의 회의실까지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바깥의 계절은 끝없는 가을인 듯 거친 바람이 나뭇잎들을 떨구어 운하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지만, 그들은 회의실에 들어앉아 영국인들이 처치 워든(churchwarden)이라고 부르는 긴 사기 담뱃대를 물고서 커다란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회의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상인들은 동인도로 가는 긴 여정에 필요한 비용을 계산했다. 그곳에는 합자회사로 운영될 해운회사도 설립되어 있었다. 상선에는 늘 무기가 함께 실렸다. 선장은 서원들도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처음부터 전쟁을 생각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군도의 포르투갈 지주들이 네덜란드 상선에 대포를 퍼부었으므로 이편에서도 맞대응했다. 네덜란드의 과거 브라반트에서 스페인이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것처럼 스페인의 사촌인 포르투갈 역시 불사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업은 번창했고, 업계 경쟁자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 새로운 선단의 속속 등장했다. 그러던 중 1602년이 되자 정부도 이시장에 합류했다. 개별적인 경쟁자들이 하나의 '제국주의'적인 합자회사로 묶였고, 이들은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교역 상대국의 통치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1602년 3월 20일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런 형태의 합자회사가 처음 생긴 것은 아니었다. 1600년 12월 31일 이미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합자한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동인도 무역을 위한 런던 척식회사'라고 불렀던 바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본국으로부터 희망봉의 동부지역 상업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사설 무역협회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순다 해협 양쪽의 큰 섬들만이, 백성들이 재배한 경작물을 대가 없이 바칠 것을 요구하는 술탄의 지배 하에 있었다. 본국으로 향하는 금의 흐름이 계속되는 한, 네덜란드 정부는 기꺼이 회사의 권리를 갱신하여 2년마다 새로운 허가장을 발부해주었다.
처음에 자바인들은 노래와 춤을 가지고 찾아온 네덜란드 사람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흥겨움은 금세 바닥났다. 양순하던 자바인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들은 곧바로 무자비한 착취자로 변했다. 어느 날 아침, 이 새로운 지배자들의 눈에 방금 지어놓은 보루의 말뚝 울타리가 부서져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원주민들은 군도에 워낙 많은 성채가 있어서 큰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취조, 심리, 판결이 뒤따랐다. 반항적인―그렇게 보인 ―자바인들은 영국인 대행업자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며, 영국 선박이 근방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봉기가 일어날 여지도 주지 않고 네덜란드인들은 군도의 지배권을 더 확실히 장악했으며, 원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자유의 기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유럽인 지배자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불평불만을 가진 말레이인이나 자바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농장의 정책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감독관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이 감독하는 핵심 사안은 말레이 군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의 개량이나 작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본국에서 거래되는 시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도 암스테르담에서 정해는 가격에 좌우되었다. 자바인들은 이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 해 동안 노예처럼 풍작을 이루는 일에 끌려 다니다가 이듬해에는 쓰레기처럼 수확물을 태워버리는 급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문명화된' 사람들이 과잉생산을 외치다가 물량을 턱없이 줄여버리는 속내를 그들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들의 행동을 그저 변덕으로 치부해버렸다.
마인히어들은 무엇으로 돈을 벌었을까? 우선, 자바인들의 땀으로 물을 주다시피 한 정향나무에서였다. 정향나무는 붉은 다육질의 꽃받침이 있는 은매화과의 월계수를 닮은 관목이다. 그 꽃을 따서 약한 불에 은근히 볶으면 향기로운 기름이 추출되는데, 입천장과 인두, 위장에 좋았다. 반쯤 말린 정향은 대량으로 선적되어 유럽의 추운 지방으로 운송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후대에 비해 식욕이 훨씬 더 왕성했으므로 정향기름이 식욕과 소화촉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로는 후추가 있었다. 별달리 눈에 띄지 않는 불그스름한 열매가 열리는 베틀후추가 그처럼 돈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사람만큼 이상한 동물도 없는지라, 혀에 불이 붙은 듯한 느낌을 주는 후추는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다. 미각돌기를 마치 햇빛을 모으는 돋보기의 가장 볼록한 부분처럼 만들어버리는 후추의 특성은, 지금까지 이런 것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로 잡았다. 또한 방부제로도 널리 이용되었기 때문에 좋은 가격을 받는 상품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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