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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역사 2부 유럽으로 퍼진 커피향기 - 런던 커피하우스에서 꽃핀 영문학 ⅲ

by 앤유 2021. 2. 1.

그리하여, 1700년 무렵 영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대표주자들은 커피 음용자였고, 커피하우스의 단골들이 되었던 것이다. 드라이든, 콩그리브, 애디슨, 스위프트, 스틸, 포프, 존 필립스, 피프스, 아버스넛은 많은 시간을 커피하우스에서 보낸 당대의 문호들이다. 드라이든은 사업상 지인들을 만나거나 출판업자들을 만날 때 윌 커피하우스로 불러내곤 했는데, 커피하우스에서 얘기할 때는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고 편지에 쓴 일이 있다. 실제로 그는 툭하면 "오늘 오후에 커피하우스에 나와"라고 말하곤 했다. 새뮤얼 존슨은 윌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진 시인들의 일상을 이렇게 썼다. "드라이든의 안락의자는 겨울에는 난로 근처에 있다가, 여름이면 베란다로 옮겨졌다. 시인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편안함을 주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이렇듯 유리한 위치에서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말끝마다 '오!'를 연발하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인간과 책에 관한 견해를 말했다."

 

또 에드워드 로빈슨에 따르면, "드라이든은 매일 윌 커피하우스에서 시와 그에 관련된 화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그는 70년 전 벤 존슨이 선술집 미트르에서 그랬던 것과 꼭 같이 그곳을 주재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매개가 된 음료는 판이하게 달랐는 점이다. 섬세하고 이성적인 커피 문화와는 달리, 맥주와 달걀을 섞어 휘젓고 육두구와 계피로 조미한 카나리아 와인은 사람을 빈정대게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수사'는 더 이상 시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았다. 장황한 언어의 흐름 대신에 날카로운 놀리와 세련된 간결함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문학적, 정치적 적수들은 맘지 와인 통 속에 빠져 툭하면 감상에 젖어드는 것에서 벗어나 냉철한 커피를 벗했다.

 

드라이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로 염소에서 양을 분류해내듯 지식세계를 분류했다. 대륙(프랑스를 뜻한다. 영국은 졸지에 변경의 거주지가 되어버렸다)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토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라신의 최근 비극, 부알로의 격언, 페로가 주장하는 근대문학의 우월성 등과 같은 모든 문제에 대해 드라이든은 판결을 내렸다. 월터 베전트는 "그의 문하생들은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소심한 태도로 듣기만 했다. 만약 그들 중 하나가 대담하게 나서서 소신을 피력했다면 분명히 드라이든의 칭찬을 들었을 것이고, 그 점을 자축할 것이었다"라고 썼다. 이는 커피가 영국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영국이들의 강한 우월감은, 커피가 야기한 긴장완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결국 위엄 있는 엄숙한 영국인으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성이 커피에 의해 쫓겨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가 횡행했다.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는 우리의 드라이든은 결투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로체스터 백작의 하인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드라이든을 에워싸고 몰매를 때린 일이 있었다. 그가 이 백작을 가리켜 평범한 시인에 지나지 않은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것이 화근이었다. 로체스터의 백작이며 시인이기도 한 존 월멋이

성공한 라이벌을 응징하기 위해 부하들을 복면강도로 위장시켜 습격한 것이었다.

 

당시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커피하우스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오늘날의 커피하우스는 터키와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와 비슷하다.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오리엔탈풍, 파리풍, 베니스풍의 커피하우스를 찾아볼 수 있지만, 드라이든 당대의 런던풍 카페는 사라지고 없다. 왜 그럴까? 편안함과 무질서함이 뒤섞인 독특한 꾸밈이 너무 영국적이어서 원래 비영국적인 요소인 커피가 그런 분위기에서 영속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드워드 워드가 쓴, 당시 런던 커피하우스의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 있다. "내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하우스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는 마을에 처음 오면 커피하우스에 가는 게 재밌을 거라고 말하면서 커피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입구가 어두워서 발을 내딛기가 힘이 들었다. 몇 발짝 들어가니 가구나 장식을 옛날식으로 꾸민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방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모여 앉은 모습이 흡사 황폐화된 치즈 가게의 쥐 떼를 연상케 했다.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거나, 뭔가를 갈겨쓰고 있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방 전체에 배의 낡은 짐칸에서 나는 역한 담배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한쪽이 안락의자로 막혀 있는 긴 테이블 모서리에는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점토로 된 물주전자와 기다란 사기 파이프, 조그만 화덕이 있었고, 그 위에 커다란 커피 주전자가 얹혀 있었다. 조그만 책 선반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병과 컵, 피부를 개선시켜준다는 화장품 광고지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음주와 적절치 못한 언어 사용에 관한 의회의 조례 문이 걸려 있었다. 벽은 대장간에 편자를 걸어놓듯이 온통 금박이 된 장식장이 있었다. 장식장 안에는 작은 유리 약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약병에는 누르스름한 연금 약 액과 인기 있는 알약들, 모발 영양제, 코담배 묶음, 커피가루로 만든 치분, 캐러멜, 기침 정제 등 효과가 확실하다고 알려진 진귀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 약제들은 소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간 그곳이 커피하우스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싸구려 물건들을 모아놓고 파는 곳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거기서 한참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문득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어 졌다."

 

이 글을 읽으면 그 방의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은 요소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바로 커피다. 커피보다는 에일 맥주와 흑맥주가 훨씬 잘 어울리는 분위기다. 물론, 이 글은 다소 풍자적이고, 실제 커피하우스보다 한결 정돈되어

있으며 꾸며진 곳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커피는 커피하우스가 어떤 모습이건 그것과는 별개로 일종의 성지처럼 남아있었다. 어쨌건 반세기 동안 영국인들, 특히 런던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의 단골이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습관적으로 커피하우스를 찾았으며, 그런 유행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잠시 다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1730년이 되자 영국의 '카페오마니아(caffeo-mania)'는 시작되었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알코올은 커피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 상속인의 자리는 마법 트리메탈디옥시퓨린 패밀리의 또 다른 멤버이자 먼 친척뻘인 중국차가 차지했다.

 

우리는 커피가, 개인은 물론 나라 전체가 총제적인 폭음에 빠져 알코올음료를 소비하는 데 대한 해독제로서 등장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다. 그러나 영국에서 커피는 언제까지나 이방인이었다. 즉, 이 나라 사람들의 감수성과 날카로움을 북돋아주기는 했으나, 장기적으로 영국인들의 특성에 맞추지를 못했던 것이다. 커피는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이다"라는 이들의 가족 고립주의와 배치되는 음료였다. 다시 말하지만 커피는 가족 음료는 아니었고,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떠들게 만들고, 논쟁을 야기했다. 심지어 상류사회에서까지도 커피는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당히 효율적이었지만 편안함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난롯가에 둘러앉아 장작이 탁탁 타들어가면서 점차 재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취기에 중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정신에도 점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커피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커피는 안티 바쿠스적인 음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뭇 격렬한 유행을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차는 평온함, 즉 불교적인 자기 몰두를 진작시켰다. 그것은 과묵한 사람들을 위한 음료이며, 따라서 커피보다 영국인들에게 알맞았다.

 

19세기가 되기 훨씬 전에, 전설로만 전해지던 테인과 카페인의 화학적 성질, 즉 차와 커피의 활성 원리가 밝혀졌다. 차의 전설은 커피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차의 형태로 카페인을 섭취했을 때 일어나는 각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도 군주의 아들이며 불교의 사도였던 달마가 포교를 위해 중국을 여행했을 때 한 데서 생활하며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먹는 것은 오로지 잎사귀뿐이었다. 그는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절대로 잠을 자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해가 지고 별이 하늘에 총총할 때라도 신과의 영속적인 교감을 위해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몸이 의지력보다 강하여, 경건한 묵상에 잠기는 시간 동안 그는 거의 잠에 정복당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난 달마는 깊은 회한에 잠겼다. 그는 감겨버림으로써 신심 깊은 귀의를 방해하는 자신의 눈꺼풀에 너무 화가 났다. 그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고 눈꺼풀을 찢어버렸다. 다음날 그 고통의 장소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자신이 내동댕이쳤던 눈꺼풀의 피부과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뿌리에서 차나무가 싹을 틔웠다. 달마는 신의 자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이 식물의 잎을 두 눈에 붙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새 눈꺼풀이 돋아났다. 그는 이어, 잎을 조금 씹어보았다. 곧 온몸에 활기가 느껴졌고, 기분 좋은 평온함과 확고한 의지력이 샘솟았다. 이후로 그는 자주 찻잎을 끓인 즙을 마셨으며, 피로나 졸음에 시달리지 않고 신에게 온전히 귀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 모를 노하우를 제자들에게도 전수해주었다.

 

이때부터 극동에서는 차를 가리켜 '달마의 눈꺼풀처럼 밝고 깨어 있는' 음료라 했다. 이 얼마나 멋진 전설인가! 차는 '깨어 있음'을 수월하게 이루어낸다. 반면에 커피는 차에 비해 더 진하고, 만들기도 까다롭다. 차가 마치 부처처럼 엄하지 않고 수월한 음료라면, 커피는 마호메트가 그렇듯이 세계를 장악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모두 아시아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차이는 매우 두 종교가 각각 선호하는 음료로 상징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건 내부적인 욕구가 없이 국가 음료가 정착된 예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특성을 양양 시켜주는 음료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아랍인들은 커피가 자신들을 더욱 아랍인답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마셨으며,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은 차가 자기실현을 촉진시켜주었기 때문에 마셨다. 특히 차는 예로부터 극동아시아의 주민들에게 강력한 평정심과 신체적인 가뿐함, 그리고 각성 상태를 진작시켜주었다.

 

커피는 운철처럼 검고, 시각적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에 차는 보석과도 같은 광채와 투명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기분을 북돋운다. 커피의 아로마에서 발산되는 '각성'은 영적인 모험으로 이끌지만 차의 아로마는 특별한 이완의 느낌을 촉진시킨다. 개인은 물론 한 국가를 이루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 두 음료는 특별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미각의 경험을 기록할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각각의 맛의 기록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트리메틸이옥시퓨린은 커피의 형태로 섭취하거나 차의 형태로 섭취하거나 상관없이 중추신경계와 혈관에 미치는 영향은 동일하다. 그러나 지적인 부분에 미치는 영향은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작가인 오카쿠라는 '차의 유려한 호박색' 안에서 '공자와 노자의 달콤한 겸양'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찻잔 속을 들여다볼 때 광대한 풍경의 환상을 본다. 그에게는 "향기로운 찻잎이 청명한 하늘에 걸린 구름이거나 부드러운 에메랄드그린의 냇물에 뜬 '수련'인 셈이다. 온후함, 정중함, 상냥함이 음료를 마시는 이의 몸에 침투하고, 네 번째 잔에 이르면 알맞은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인생의 모든 사악함과 부정함이 피부 모공을 통해 방출된다. 다섯 번째 잔에서는 정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며, 여섯 번째 잔은 속세를 초월한 경지로 이끌며, 일곱 번째 잔에서는 먼 땅에서 불어온 바람을 소매 속으로 부른다." 커피를 두고는 이런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차의 자연스러운 소박함은 중국인, 러시아인, 영국인 등 차와 친밀히 지낸 모든 미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는 가장 충실한 동반자이며, 길을 안내하는 맹인견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차는 활동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이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차 한잔을 시간과 공간의 척도로 쓰기까지 한다. 프랜시스 영 허스번드 경이 중앙아시아 고지대에서 젊은 농부에게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젊은이는 "차 석 잔"이라고 대답했다. 차 석 잔을 마시는 시간에 닿는 거리, 즉 5마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런가 하면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은 대신 쓰는 화례이기도 하다. 필요 불가결하며, 성스럽고, 귀중한!

 

영국인들은 이 신뢰하는 동반자와 오랫동안 친밀한 동맹을 유지해왔다. 2백 년 동안 차는 그들의 정신적인 삶과 제국의 초석이었다. 영국인들이 커피를 배척하고 차를 선택한 데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바야흐로 인도 정복이 시작되어, 영국은 차 재배 국가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 대륙이 영국의 땅이 되면서 차와 대영제국은, 마치 맥주와 런던과 같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커피의 위치는 이와는 많이 달랐다. 영국이 아라비아를 차지하지도 않았음은 물론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커피는 차처럼 영국의 일용품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 사실은 영국이 커피를 배척하는 순간에도 프랑스에서 여전히 커피를 선호한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프랑스가 아시아에서 영국에게 추월당하는 일이 많을수록 차에 대한 호감은 그만큼 줄었들었던 것이다. 1766년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수출한 차의 양이 600만 파운드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로 수출하는 양은 200만 파운드에 그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파리와 프랑스는 아라비아의 선물을 열렬히 사랑하게 된 반면, 런던은 부드러운 황색의 중국산 음료에 열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