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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향기 2부 유럽으로 퍼진 커피향기 - 투르크 대사와 파리지엔 ⅲ

by 앤유 2021. 1. 24.

그로부터 5년이 채 지나지않아, 말리반이라는 또 다른 미국인이 파스칼의 전철을 밟아 루 페로에 조그만 투르크풍 카페를 차렸다. 그가 파스칼과 달랐던 것은 전적으로 커피의 조달에만 의존하지 않고 상품을 다양화해서 담배도 취급한 점이었다. 어느정도 세월이 흐른후 말리반은 네덜란드로 이주했고 파이릐 점포는 기독교로 개종한 페르시아인 조수 그레고르가 인수했다.

 그레고르는 모국에서 지낼때 커피와 문학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파리라고해서 뭐가 다를까? 커피콩 속에는 문학적 영감과 유사한 어떤 정신이 숨어있는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커피하우스를 코메디프랑세즈 근처의 루 마자랭으로 옮겨보는것은 어떨까? 그 극장이라면 베르사유에 있는 태양왕의 궁정을 능가하는 첨단 유행의 중심이 아니던가!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대단한 이야기꾼들이었다. 그들은 연극과 배우와 첫날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잘난체했다. 또 그것을 할수 있는 장소, 살롱을 좋아했다. 그레고르가 코메디 프랑세즈 코앞에 가게를 차린것은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간이나 연극이 끝난 후에 그는 사람들이 늘어놓는 가십에 대해 친절하고 싹싹한 태도로 응대했다. 비록 그레고르의 카페가 그 극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코메디프랑세즈를 따라 매장을 옮기는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분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1789년에 최초의 극장카페가 성립되었다.

 

 그레고르가 파산하지 않고 잘해나가자,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페르시아인이 말리반으로부터 인수한 원래의 카페는 마카르라고하는 자국 동포에게 양도되었다. 페르시아에서 '마카르'는 행복 또는 행운을 의미하지만,카페의 새로운 경영자 마카르에게는 그다지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는 향수병에 시달리다 영원히 파리와 프랑스에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마카르는 그레고르와 같은 언변이나 영리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레고르는 커피를 서빙하는 동안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행동할수있었고, 부알로의 문하생들과 더불어 '커피하우스 장소의 일치'에 대해 대화를 나눌수있었으며, 라신과 코르네이유의 숭배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수있었다. 마카르가 떠나자 '겐트출신'으로 알려진 플레밍이 뒤를 이었다.

 1700년 이전까지 파리에서 태어난 토박이 파리지엔이 커피하우스를 차리는일은 거의 없었다. 커피하우스 경영자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국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문예와의 교우, 즉 검은 아폴로와 법률가들이 쓰는 가발사이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카페를 프랑스라고 하는 토양에 필수굴가결한 요소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전 국토가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고, 커피가 프랑스인의 머릿속에 최고의 음식으로 자리잡은 후에야 생겼다.

 1690년경 다리를 절뚝거리는 한 남자가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크레타 섬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후에 캉디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자본이 부족해 커피하우스를 차릴수는 없었던 그는 부득이 새로운 상술을 개발해냈다. 바로 집집마다 커피를 팔러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는 깔끔한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다녔는데, 그것은 갈색 피부에 썩 잘어울렸다. 한 손에는 커피주전자를 올려놓은 조그만 화로를 들고 모국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내용을 번역하자면 아마 이쯤 되었을 것이다.

 

 오, 내가 사랑하는 음료여,

창조주의 섭리로 태어났도다!

술꾼들을 포도에게서 멀어지게하니

저 와인보다 훨씬 낫구나!

 

 이렇게 노래하며 그는 손님의 집 문을 두드려 2수를 받고 석잔의 커피를 따라주었다. 그런다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빠르게 그 옆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검은 음료의 향내는 수많은 사람들의집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캉디오를 모방한 사람도 생겼다. 그중에는 조제프라는 레반트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침마다 갓 구운빵을 팔듯 이집 저집 커피를 팔러 다니는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았따. 커피가 아직 일상생활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내 명백해졌기 때문이었다. 가정에서도 극장에서도 커피를 상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려면 뭔가 좀 더 대중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세기의 전환점에서 프랑스 대중의 생활은 새로운 영상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볼수 없었던 대화와 비판을 좋아하는 성향이 두드러졌고, 파리지엔들에게서 튜튼족과 프랑크인의 특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다른 라틴국가의 주민들, 예를 들어 밀라노, 나폴리, 마르세유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파리지엔들도 연례행사가 아닌 또 다른 상황을 위한 거리생활의 기호가 몸에 배게 되었다. 새로운 기호를 익히는 일이 파리지엔들의 일과가 될 무렵 커피도 각 가정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맡아 일조를 했다. 비록 거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정치나 사업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한 세기가 시작되면서 갇혀있던 시민의 자유가 새로운 대륙의 발견처럼 움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702년 에 이러한 변화의 상징으로서 정말로 근대적인 대규모 카페가 파리에 생겼다. 이 '카페 프로코프'의 설립자는 팔레르모 출신의 신사 프로코피오 디콜텔로였다. 지중해 연안 항구의 주만들이 흥히 그렇듯이 프로코피오는 파리제엔이나 비엔나 시민들보다 훨씬 일찍 커피를 접하고 즐겼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불행한 일을 겪은 후 파리로 들어온 그는 스물두살에 파스칼이 운영하는 커피하우스의 급사가 되었다. 3년후에는 파리지엔인 마르그리트 크로인과 결혼하여 당시 관습대로 여덟아이를 낳아 대가족을 이루었으며 1669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좋은 집안에서 자란 또다른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여 네아이를 더 얻었다.

 그가 이렇게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정력적으로 수행하고있을때 때마침 마르세유에서 커피가 성욕을 저하시킨다는 비방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름을 콜텔로에서 쿠토로 바꾸었다. 얼마후 그는 음료 제조업자들의 길드 '메이트르-디스틸트'의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1702년 에는 프랑세즈 극장 맞은편에 널찍한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카페 프로코프는 18세기의 모든 파리지엔 커피하우스의 원형이다. 콜텔로-쿠오의 성공의 비결은 투르크풍이 유행을 하건 그렇지않건 신경쓰지않고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을 고수한 덕분이었다. 그의 모토는 '파리지엔을 위한 파리'였다. 그는 고객들이 원하는바를 미리 알아채어, 그들이 안락하게 느낄수있는 모든것을 갖춰놓았다. 거울과 촛대, 대리석 상판으로 된 탁자로 카페를 꾸미고, 커피와 곁들여 초콜릿이나 알코올음료, 얼음, 샤베트, 각종진미를 함께 제공했다. 어떻게 보면 현대의 제과점을 연상시키는 형태였는데, 나중에 여기서 카페의 특성만을 별도로 분리되어 나왔다. 어쨌든 카페 프로코프는 기존과는 다른 최초의 유럽식 커피하우스였다. 그리고 이곳을 진원으로, 갈리아니가 말한 '유럽의 커피'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