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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역사

커피의 역사 2부 유럽으로 퍼진 커피향기 - 런던 커피하우스에서 꽃핀 영문학 ⅱ

by 앤유 2021. 1. 30.

이 커피하우스는 성 미카엘 성당 맞은편 콘힐에 세워졌기 때문에 신성한 기운이 함께 하게 되었다. "커피 음용의 미덕이 처음으로 공공연히 보여졌으며, 파스칼 로세아에 의해 영국에서 판매되었다"라는 대목은, 커피하우스 위치 때문이었던지 이곳의 평판이 좋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대니얼 에드워즈의 시종은 강력한 적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모했다. 북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거인 맥주가 위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조업자와 선술집 주인들은 맥아와 홉으로 주조되는 술이 조그만 커피콩을 달여낸 즙에 의해 쫓겨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장에게 가서 '자유시민도 아닌' 레반트 사람의 행각을 고발했다. 당시에 외국인들이 영국 국내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던가? 시장은 이를 좋은 지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마부인 보우먼을 파스칼 로세아의 동업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양조업자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새로운 상행위에 높은 세금을 부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로세아는 연간 6펜스 은화 1,000개를 세금으로 납부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매주 상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보우먼은━커피하우스에서 맥주도 함께 판매할 것을 종용받았다. 그렇지만 커피의 성공은 플리트스트리트의 이발사인 제임스 파에게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는 이발소를 찾는 고객에게 커피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류 판매인들은 똘똘 뭉쳐서 제임스 파를 공격했다. 그들은 제임스 파를 법정으로 불러냈다. "이발사인 제임스 파는 스스로 커피라고 부르는 음료를 끓여 판매함으로써 조제할 때 발생하는 악취로 이웃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나아가 이 음료를 준비하기 위해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끊임없이 불을 때 이웃 주민들에게 큰 위험과 두려움을 야기하므로 이에 고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연한 탄핵과 고발에도 불구하고 파의 커피하우스는 문을 닫지 않았으며, 1666년 런던 대화재의 불길에서도 살아남았다. 도시의 주요 건물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제임스 파의 커피하우스는 건재했다.

 

나아가 코벤트가든 인근 극장가에는 수많은 커피하우스가 앞 다투어 문을 열었다. 그중에서도 주인의 이름을 내건 버튼, 갤러웨이, 윌, 톰, 등의 커피하우스의 명소가 되었다. 저명인사들, 유복한 상인들, 법관, 의사, 하원의원들이 새로운 자극을 즐기기 위해 모여들었다. 어깨까지 닿는 커다란 곱슬머리 가발을 쓴, 나라의 정신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검은 아폴로의 사발에서 통찰력과 맑은 정신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검은 아폴로의 사발에서 통찰력과 맑은 정신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난폭한 맥주의 신 갬브리누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커피가 명함을 내민 곳에서 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례를 좇아 이번에는 질투의 여신 헤라가 끼어들었다. 또 다른 여신이 아프로디테는 갬브리누스의 패배를 빌미로 마르세유에서 지위를 공고히 한 후 런던의 여성들을 자극하여 검은 음료에 대한 반대 세력을 만들어냈다. 1674년 초, 자신들이 너무 외롭게 밤을 보낸다는 사실을 여성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이 불길한 열매가 수입된 뒤로 남자들이 그 열매가 생산되는 사막처럼 불모의 몸이 되어가고 있으며, 강건한 선조들의 후손은 원숭이나 돼지처럼 멸종 일에 있다" 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편들은 아내들의 이 같은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소책자를 만들어 자신들의 행동을 해명하고, 커피의 미덕에 대해 설파했다. 그리고 새로운 음료를 둘러싸고 횡행하는 중상과 비방을 불식시켰다.

승리는 남편들에게로 돌아갔다. 커피를 비난하는 런던 주부들의 과격한 방식이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이렇게 하여 헤라가 패배하기는 했으나 커피에 대한 비난과 고소는 가정불화와 사업 방해라는 문제의 형태로 새록새록 다시 나타났다. 가장 흔한 얘기는 커피하우스가 남자들을 빈둥거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고대로부터 술집에 대해 퍼부어지던 비난의 또 다른 형태에 다름 아니었다. 당신의 팸플릿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커피하우스는 산업에 커다란 방해물이 되었다. 과거에 신망 높았던 유능한 신사와 상인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커피하우스를 연다. 이들이 커피하우스 한켠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어 시작하면 보통 서너 시간을 소비하는데, 이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들을 불러내기가 다반사이므로 결국 수많은 남자들이 여섯 시간 내지 여덟 시간이나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술집이 드나드는 취객들에게나 할 법한 소리였다. 어쨌든 커피와의 경쟁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갬브리누스 신은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를 빼앗기고 있었고, 때때로 부평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 그는 차츰 정치적인 경제가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커피하우스의 성장은 귀리와 맥아, 밀 등 다른 농산물의 판매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다. 우리의 농부들은 곡물을 팔지 못해 망하고 있고, 지주들 역시 지대를 거둬들이지 못해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듯 통렬한 비난의 글에도 불구하고, 커피 음용의 확산은 확연히 나라 전체의 절주의 확산을 가져왔다. 그리고 커피의 끊임없는 행진은 정치적 상징인 제우스와 맞닥뜨리고서야 주춤했다. 커피의 신화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끊임없이 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미카의 총독인 카이르 베이가 커피 음용자들이 정치에 참견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탄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런던에서도 커피하우스가 실제로는 정치적인 클럽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문제 삼았다. 당신의 한 소장을 보면 커피를 반대하는 아내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듯한 문장이 구구절절 나열되어 있다. "평범한 직업인이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앉아 정치 이야기만 하는 동안 불행한 그 자녀들은 집에서 먹을 것이 없어 울고 있어야 하다니, 이 무슨 비극이란 말입니다! 또 뛰어난 장인들도 그런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군대에 징집되는 바람에 사업이 망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비방이었다. 커피하우스는 오히려 일반인들이 아닌 정치가들의 회합 장소였다. 커피하우스의 단골들인 정당의 정치인들은 조직에 가담하지 않는 무관심한 일반 커피 음용자들을 내쫓아버렸다. 민주당원이거나 휘그당원이거나, 또는 런던의 성 제임스 궁 사람들만이 남았다. 지금 같으면 커피하우스에 얼굴도 내밀지 않을, 귀족정치의 일원인 토리당원들과 그 지지자들 역시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이렇게 당파는 서로 달랐지만 하원의원들은 모두가 『머리카락을 훔친 자(The Rope of the Lock)』를 쓴 시인 포프의 말에 동의했다.

 

 

커피는 정치가들을 현명하게 만들지.

또한 눈을 반쯤 감고도 모든 걸 꿰뚫어보게 하지.

 

 

정부는 통제 불능의 탐탁지 않은 정력가들이 끊임없이 커피하우스를 들여오는 것에 지친 나머지 커피하우스의 폐쇄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1676년 새해를 48시간 앞둔 시점에서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폐쇄 조치한다는 윌리엄 존스 법무장관의 포고문이 나붙였다. 명분은  "커피하우스에서 정치인들이 악의에 찬, 수치스러운 행위를 한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국왕의 위엄과 그 치세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 맑은 정신"의 힘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의회 전체가 정당을 막론하고 한데 뭉쳐 '억지스럽고 불법적인 포고'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커피하우스는 이미 정당의 사무실이자 당원 선발을 위한 접대실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폐쇄한다면 정치를 해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런던은 거대한 폭풍처럼 흥분했고, 매콜리가 말했듯이  "범우주적인 항의 사태가 일어났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정부는 후퇴했다. 커피하우스 주인들은 그 안에서 책이나 전단 등을 팔지 않을 것이며, 선동적인 연설이 행해지지 말도록 할 것을 서약한 후에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이로써 누구나 원하면 공공의 오락장소에서 자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차가 보편적인 국민음료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1700년경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영문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왕정복고 시대의 영문학의 문체는 여유로우면서도 신랄하게 논쟁하는 면에서나 논리적인 면에서나, 여전히 라틴문학에 턱없이 뒤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 작가는 영국 작가가 30페이지에 걸쳐 전개해가는 것보다 더 많은 찬반양론을 단 한 페이지에서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커피가, 영국인에게서는 전혀 생소했던 활발한 대화의 풍토를 불러일으켰다. 이전에 영국 작가들의 글은 끝없는 독백의 완만한 강물이었고, 급류에서 느껴지는 막간의 맛을 살리는 문체의 묘미가 부족했다. 해럴드 루스는 『케임브리지 역사(Cambridge History)』에서 공개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루스의 그런 이의도 커피하우스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글을 장황하게 쓰는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대중 앞에서는 조용한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 히폴리테 텐은 1872년 출간된 『영국에 관한 기록(Notes sur I'Angleterre』에서 교양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담화 자체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들은 손님을 초청하고 활발한 담화와 토론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뚝뚝하다거나 지루해하거나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의 깊게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손님들도 만족해한다. 만약 그들이 직접적인 질문을 받게 되면 정중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여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누구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흔히 '그 사람은 말수가 적어'라고 이야기된다."

 

독자들 역시 커피가 그런 기질을 지닌 사람들에게 얼마나 괄목할 만한 영향을 끼쳤을지 충분히 상상이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가능한 말을 줄이는 대신 혼자서 많은 독서를 통해 이를 보상하는 방식을 추구했는데, 커피는 이런 영국인들을 고독으로부터 끌어내는 한편, 또한 자기중심적이며 독선적인 태도를 완화시켰다. 다시 루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담화는 생각에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대화를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다잡는 일은 독서를 통한 것보다 더 치밀하고 유연하다. 귀는 눈만큼 쉽게 긴 문장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사람은 더 압축된 문장으로 말을 하게 된다. 중산층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교육을 마치기 시작했다. 커피하우스는 생각을 나누고 공론을 형성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그들은(비록 그들 자신은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새로운 휴머니즘의 전파를 위한 조합이었고, 작가들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대의 사고방식과 접할 수 있는 매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