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은 쿠션에 앉아 무엇이든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대답해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은 음료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녔고, 자신의 국가적인 음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광채를 발했다.
그는 수세기 전 두 명의 아라비아 수도승이 어떻게 커피나무를 발견했는지도 이야기했다.
"한 사람은 알 샤드힐리, 또 한 사람은 알 아이드루스라고 합니다. 알제리 사람들은 독실한 신자인 알 샤드힐리가 실제로는 아랍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가 자기네 종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알제리에서는 커피를 '샤딜리에(shadilye)'라고도 부릅니다."
슐라이만의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숙녀들의 눈앞에는 먼 이국의 신비로운 땅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자신은 이 전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실제로 알 샤드힐리와 알 아이드루스가 커피를 발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알 아이드루수가 가장 핵심원료인 커피가루를 내다버린 것으로 보아 음료를 만드는 법에 대해 매우 조금밖에 알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 가장 만족할 만한 커피의 조리법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지요. 투르크제국 내에서도 생강과 향신료를 첨가하는 곳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방법으로서 죄가 되는 행위입니다. 『코란』이 유일무이하듯, 커피 역시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그의 어조는 강한 신념에 차 있었따. 금속주전자에서 끓고 있는 유동체의 표면에 오렌지와 갖가지 무지개빛으로 영롱한 보라색 물방울이 맺히는 동안, 대사는 커피에 대한 예찬을 계속했다. 그는 아라비아의 남서쪽에 있는 커피농장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곳은 햇볕과 수분이 풍부한 천혜의 땅이었다. 소중한 커피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어놓았다. 아라비아의 노인들은 커피를 너무 좋아하여 커피가루와 버터를 한데 이겨 통째로 삼키기도 했다.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에는 종교심이나 도덕심, 그리고 신체를 강화하는 데 커피가 버팀목이 된다고 믿었다. 독실한 설교자 아흐멘드 벤 자디브는 "체내에 커피를 담고 죽는 자는 지옥불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 고 선언했다. 커피는 선량함을 고무하며, 신앙 활동을 지지한다. '카와'라는 말은 '에너지'를 뜻하며, 커피를 마심으로써 무슬림은 생전에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인다.
대사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숙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예멘 땅에서 커피나무가 자라는 지역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에 그는 자신이 이 머나먼 서방 파리에 온 목적, 즉 정치적인 임무를 깜박 잊어버렸다. 그럴 때의 그는 또 다른 무슬림 자연의 극단을 향해, 수피교적인 묵상을 위해 떠나온 사람이었다. 몇 년 후에 투르크는 비엔나 근처에서 독일에 대패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군인 라인 강을 건너 투르크에 합세 하지도 않았고, '가장 기독교적인 왕' 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독일에 투르크의 맹습을 격퇴하기 위한 지원군을 보내지도 않았다. 독일 역사가 랑케는 프랑스 왕이 이 전쟁에서 투르크의 반대편에 서지 않은 것은 그들이 라인 강 전역을 차지하고 스트라스부르까지 점령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상황이 그쯤 되어 자신의 군대를 출정시키면 전 기독교국과 독일의 구세주로 나설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기대와는 달리 오스만제국은 발칸으로 되돌아가고 말았고, 그대신에 '이슬람의 와인' 커피가 비엔나와 파리를 정복했다.
정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적으로 소비되기에 커피는 너무나 고가의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커피콩을 살 수 있는 곳은 마르세유가 유일했고, 그나마 1파운드의 가격이 80프랑에 달했으므로, 부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부자들만 프로방스에서부터 사람들을 보내 커피를 사갔다. 그들이 말하자면 투르크 식에 열광하는 '투르크 마니아'들이었다.
당시 최고의 풍자가였던 몰리에라는 1670년 작 <평민귀족>에서 이들이 투르크 마니아를 부조리의 극치로 묘사했는데, 궁정에서 공연할 때는 풍자의 강도를 낮춰야 했다. 슐라이만 대사는 이미 1년 넘게 파리에 머무르며 상류층 인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리에르는 주인공 주르댕의 주변을 돌며 춤추는 투르크인으로 장난꾸러기 소년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이는 투르크의 왕자의 흉내를 내는 시민을 바보 같은 존재로 풍자한 것이었다.
이 촌극은 많은 파리지엔들에게 '오리엔탈 패션'이 약간 별스러운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터번을 두르고 급조한 투르크 가운을 걸쳤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투르크인이라고 여기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리하여 커피는 프랑스 바로크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고 말았다. 커피 음용을 동경하는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 되었다. 당대의 지적인 여성, 마담 세비느조차 반기를 들고 나섰다. 1676년 5월에 그녀는 딸이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된 것을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드모아젤 메리가 드디어 그 음료를 집밖으로 몰아내게 되었군요 그런 불상사를 두 차례 겪고 나서도 다시 좋아하기란 쉽지 않아요!" 이 어머니는 더운 음료는 모두 피를 맑게 하는 음료와 비교했을 때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를 낳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또 임파액의 구성은 대개 창자의 열에 따라 좌우되므로 광천수로 체내를 세정하는 것이 과일 식이요법과 더불에 커피보다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이 대작가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커피에 대한 그녀의 적개심은 유행과의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근심 때문이었따. 그녀의 글은 세상의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어떤 글보다도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딸아. 이 어미가 무릎을 끓고, 눈물로써 너의 애정에 간절히 호소한다. 그래, 지난번처럼 긴 편지를 쓰지는 않으마. 너의 유약함과 기진의 원인이 내게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아가야, 어쩌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네병에 나도 책임이 있는 거란다!" 이 백작부인의 딸은 유년기에는 상당히 빠른 성장을 보였으나 병치레가 잦아
그 어머니의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따. 1679년11월8일 수요일에 마담 세비느는 딸에게 편지를 썻다. "최근에 뒤센 박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네게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내생각엔 다른 의사들보다 세심한 분인 듯 싶구나. 요즘 네 체중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단다 ...... 너한테는 우유보다 죽과 닭고기스프가 나을 거라고, 이런 걸 많이 먹어보라고 하시더구나. 네 혈액의 상태가 여기서 더 좋아지지 않으면 심각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그분 말씀이 커피는 혈액의 온도를 상승시키고 피의 순환을 빠르게 하기 때문에 코감기나 폐결핵 환자들에게만 권장할 만한 음료라고 하셨어. 더구나 너처럼 마른 사람들에게는 커피는 독이라고 하셨어. 부디 네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사랑하는 딸아 , 커피를 마시면 원기가 돋는 것같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 뿐이란다. 그저 순환작용이 활발해져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 반대로 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하는구나. 잊지 말아라, 내 딸아. 뒤센 박사님은 오로지 너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충고해주신거라는 걸 말이다." 여기서도 커피는 음료라기보다는 약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커피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평민들은 아예 커피를 구경도 못했다. 커피 음용은 집안 경제가 자립적인 특별한 사람들의 집에서만 주로 이루어졌다. 당시 파리의 상류층은 대중적인 유흥장소에 출입하지 않았다.
커피의 소비를 일반 대중에게로 돌리려고 처음 시도한 이는, 그 선조가 동방의 혈통이라는 것 외에는 슐라이만 대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남자였다. 파스칼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진 이남자는 1672년 생제르맹의 시장에 프랑스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따. 그것은 정식 커피하우스라기보다는 일종의 견본시장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당시 생제르맹의 시장에서는 9월마다 커다란 전시행사가 열렸다. 9개거리에 140개 전시 부스가 세워진 산업박람회였다. 파리지엔들은 행사장을 떼로 몰려다니며 지역후원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따. 불이 밝혀진 루나 공원에서는 박람회의 부대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 가면 난쟁이나 비대한 여인, 낙타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본행사와 부대행사의 떠들썩함 속에서 미국인 파스칼인 프랑스인들이 '커피를 좋아할까, 그렇지 않을까?' 라고 자문하며, '메종 드 카오바'를 차린 것이었다. 이 카페는 파스칼 자신에게는 익숙한, 콘스탄티노플의 커피하우스를 기대로 옮겨놓은 형태로 꾸며졌는데, 투르크풍의 분위기 때문에 프티부르주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놀라운 일은 이들이 커피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곳의 커피는 한잔에 3수를 넘지 않았다.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파스칼은 커피값이 와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적인 음료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 영민한 미국인이 찾아낸 방법은 중간상인을 일체 개입시키지 않고 레반트에서 직접 커피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착오이기도 했다. 그는 파리지엔들이 커피 자체에 관심이 있을 거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박람회의 재미'에 참여하는 의미 이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가게를 파리에 있는 커델에콜로 옮기자마자 파산해버린 것이 그 반증이다. 생제르맹에 놀러 나와서는 콧웃음을 치며 등을 돌렸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커피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것이었다. 커피의 가격을 낮추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파스칼은 판매용 커피에 층층나무 열매와 도토리를 섞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일은 전문가로서의 그의 심사를 적잖이 상하게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파산하여 야음을 틈타 런던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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