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하비는 죽음이 가까워질 무렵 자신의 변호사를 불러 커피콩을 보여주었다. 그는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홈을 파듯 알갱이들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조그만 열매는 행복과 지혜의 원천이라네!"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 56파운드의 커피를 런던의과대학에 기증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 기증한 커피가 남아 있는 동안에즌 자신의 사망일이 되면 함께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당부했다. 단지 56파운드의 커피를 가지고서! 이는 커피가 아주 소량만 소비되었으며 클레오파트라가 진주와 함께 녹여 썼다는 초제 못지않게 귀한 음료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커피가 약물로 여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비는 자신이 죽고 20년이 지나면 런던 전체의 커피하우스가 들어서고, 자신이 베니스로부터 거금을 주고 사온 그 커피로 넘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배로 대량 선적해 들여올 것이라는 것을.
지금도 영국 사람들은 커피하우스 내지 커피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은 아니다. 영국의 전통적인 음료는 커피가 아니라 '차'다. 달걀 껍질 모양의 주둥이가 넓은 도자기, 소위 '찻잔'에 담아 내는 금적색의 그 음료이다. 와인이 그리스의 국적 음료이고, 커피가 아랍에 이어 프랑스의 국가적 음료인 것과 같이, 차는 영국의 국가적 음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80년에서 1730년까지 반세기 동안 런던은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커피를 많이 소비했다. 차의 시대는 그 이후에 도래했다.
1650년대에 영국 국민들의 몸은 병적인 상태에 있었고, 오로지 트리메틸디옥시퓨린의 강한 처방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가 있었다. 만취의 악덕, 알코올중독의 병증이 계층을 막론하고 만연해 있었다. 오랜 유혈사태로 지친 사람들은 술에 절어 슬픔을 잊어보려 했따. 런던뿐 아니라 나라 안 모든 지역과 마을의 어귀에는 어김없이 선술집이 들어서 있었다.
서민들은 누가 새로운 지배자로 권력을 잡든,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를 물리치고 또다시 득세를 하든 상관없이(한 세기전에 스미스필드를 불태웠던 화염이 여전히 그들의 기억에 생생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마약을 필요로 했다. 항구에는 뱃사람들이 길고도 진저리나는 항해의 고통과 바다생활의 무자비함을 잊어버리려고 술을 마셨다. 선원들이 육지에 발을 디디면 그곳에 바로 선술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륙에서도 어디서나 술을 팔았다. 폭력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고, 술병과 술잔이 무기로 변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16세기 말과 17세가 초 만취 풍조에 대한 풍속은 셰익스피어의 글을 읽어보면 눈에 보이듯이 전해진다. 셰익스피어 역시 자기가 본 대로 썼기 때문이다. 그는 쇠고기로 근육을 채우고 알코올로 호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았다. 폴스타프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가들의 등장인물에서도 이들 주정뱅이들이 럼주와 진, 브랜디 속에서 죽지 않고 사는 게 이상할 정도로 묘사되어있다. 게다가 그들이 맘지, 카나리아, 마데이라, 셰리, 포트와인 등과 여러 독한 증류주도 엄청난 양을 들이켰다. 물론 이것은 그런 비싼 주류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마이터와 팔콘, 머메이드 등에서 술을 마셨던 이름 있는 집안 자제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외의 수많은 빈민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나오는 바돌프와 피스톨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다른 술을 마셨다.
브란데스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영국에 그처럼 많은, 다양한 종류의 술이 있은 적이 없었다"라고 썼다. "수많은 맥아주가 에일과 맥주로 대별되었다가 다시 가벼운 맥주로 세분되었고, (이쯤에서 음주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인 플레처가 몇 구절을 읊은 것인데,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약한 맥주를 마시는 사람, 맑은 정신으로 잠자리에 들어, 낙엽이 떨어질듯 곯아떨어졌다가 지독한 10월에 죽는다. 그러나 독한 맥주를 마시는 사람, 거나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어 살만큼 살다 정직하게 죽는다.") 꿀 용액을 발효시켜 만든는 세 종류의 꿀술에는 각각 몇 가지의 특별한 식물이 첨가되었다. 예를 들면, 흰 꿀술에는 로즈메리와 백리향, 들장미, 박하, 크레스, 네덜란드국화, 공작고사리, 페튜니아, 좀쌀풀, 초롱꽃, 서양호랑가시나무, 다북쑥, 타마리스크, 범의귀 등이 첨가되었다.
이렇게 여러 화초로 담은 술은 사람들을 흥청망청하게 만들었고,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과 뱃속은 흥분의 전시장이 되었다. 이 술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주로 일반대중들에게 소비외었다. 또 맛에 대한 기호가 까다롭고, 자신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56종의 프랑스 와인, 36종의 스페인 와인, 그 비슷한 수의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와인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이 술들은 원산지에서는 별로 소비되지 않고, 일단 영국으로 실려온 다음에서야 애주가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았다.
그러니 『오델로』에서 이아고가 이렇게 권주가를 부른 것도 지극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영국에서 술을 배웠어. 술이 제일 센 건 영국인. 덴마크, 독일 ......당신들 배불뚝이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과 상대도 안 되지." 이말에 카시오가 이의를 제기하자 이아고는 단호하게 몰아붙였다. " "영국인들은 아주 쉽게 자네들을 보내버릴 수 있다네. 자네들을 쓰러뜨리지 않기 위해 배려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이 마시기 시작하면 술독이 다시 채워지기 전에 네덜란드인들을 토하게 만들어버리지."
때는 커피가 약제로서 처음 소개될 무렵이었다. 처음 소개되고서 얼마 간 커피는 처방에 의해 조제되었고, 앞부분이 소용돌이 장식으로 꾸며진 서랍에다 '커피 아랍' 이라고 흰 자기 재질에 씌어진 품목 라벨을 붙여 보관했다. 그러다 유명한 의사 한 사람이 커피의 주요한 특질을 발견했다. 월터 럼지라는 이 의사는 윌리엄 하비와 마찬가지로 베이컨의 제자였는데, 커피로 '술고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럼지는 자신이 쓴 글 중 '커피의 실험' 이라는 부분에서 이같이 밝혔는데, 당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일이 모두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던 시대였다. 몰리에르 당대의 프랑스에서 의료계 종사자들이 비웃음거리였던 것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이같이 선언한 것은 커피로서는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의사들이 알코올 중독 만연을 근절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음료가 있다고 선언하자, 이는 영국 전역에서 얕은 잠에 빠져 있던 청교도적 정신을 일깨워 사람들이 의학적인 충고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안티 바쿠스적인 음료로서 커피를 추천한 것과는 별개로, 에드워드 포코케, 슬로언 박사, 그리고 무엇보다 저 유명한 래드클리프는 커피를 아예 만병통치약으로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공복에 커피를 마시면 폐결핵과 안염, 수종을 치유하는 데 최고의 효과를 보인다고 했으며, 심지어 통풍과 괴혈병, 천연두까지도 낫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석학들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 없는 경고를 덧붙인 것이 재미있다. 즉, 커피를 우유와 섞어 마시는 일에 대해 엄충 경고한 것이다. 나병이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상식에 빗대어 보면 아마 문둥병을 가리키기보다는 건선같은 피부질환을 의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근대 이후 런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면 믿지 않고, 옛날 아랍에서나 있었던 이야기로 치부한다. 나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염소가 등장하는 커피의 기원에 관한 전설이 염소의 똥과 커피콩이 외관상 닮았다는 점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바 있다. 피부질환에 관한 이야기 역시 우유을 섞은 커피의 표면이 의사들에게 발진을 상기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커피가 런던에 입성한 방법은 파리때와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인들은 더운 피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정도로 피가 뜨거웠기 때문에, 이 나라의 의사들은 오히려 열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차가웠고, 피의 순환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몸을 데우는 방법이라고는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하기야 정맥에 불기운을 주입하는 방법이 있긴 했었다. 영국인들 중 많은 이들이 우울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많은 이들은 성마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때로는 분노와 우울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커피가 나타나 반세기를 함께 해온 것이다. 커피는 대중적인 음료이기는 했으나 등장한 모습 자체는 네덜란드식의 챙 넓은 모자에 주름 깃, 흰 소매가 달린 검은 옷의 청교도를 연상시켰다. 프랑스에서 커피가 그렇지 않아도 잠이 없는 사람들을 과거의 어느 때보다 심한 불면으로 이끌고, 가뜩이나 경박한 기질이 있는 사람들을 더 경박하게 만드는 동안, 런던에서는 커피의 유행이, 마치 성직자가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절주의 분위기를 몰고 왔다. "너 자심이 훌륭한 그리스도교인임을 잊지 말라!" "반드시 때맞춰 교회에 나갈 것이며 맑은 정신으로 교회에 가야 함을 명심하라!" 무엇보다 신사답게 행동할 것이며, 나이프는 접시 옆에 두어야지 이웃의 늑골을 향해 휘드르면 안 될지니!"
저 미국인 파스칼이 파리에서 파산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몰래 런던으로 달아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국의 수도에는 이미 그와 꼭 같은 이름을 가진 경쟁자가 커피하우스를 차려놓고 있었다. 바로 그리스 사람인 파스칼 로세아로, 중세에 성 마르코의 사자가 발톱을 고쳤던 라구사 출신의 진짜 그리스-베니스인이었다. 런던의 상인인 대니얼 에드워즈가 스미르나로 여행을 갔다가 귀향하는 길에 배가 잠깐 정박했던 곳이 바로 라구사였다. 아름다운 여름날 아침에 거기서 그는 그리스 모자를 쓴 커피 상인 로세아를 만나게 되었다. 소아이사의 모든 사람들이 커피를 만들 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필 커피 상인을 만난 것이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에드워즈는 파스칼 로세아를 그리스-레반트 세계의 변두리에서 빼내 런던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로세아는 이 영국인의 시종이 되어 아침마다 주인에게 커피를 만들어 대령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에드워즈에게 수많은 손님을 찾아들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라고 애더슨은 자신의 책 『상업의 역사(History of Commerce)』에 썼다. "에드워즈는 자신을 찾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늘 그랬던 것처럼 커피와 친해지면 반드시 다소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애드워즈는 친구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일보다 더 바쁜 용무가 있을때는, 파스칼을 시켜 일에 방해받지 않도록 옥외에서 커피를 대접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검은빛의, 말을 많이 하게 만드는 음료" 는 파스칼 로세아의 관리 하에 자연스럽게 옥외 부스에서 상점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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